차이코프스키와 교향곡 제6번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한 1년 후인 1889년 10월 한 편지에서 “나의 창작의 최후를 장식할 장중한 교향곡을 작곡할 작정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장장 작곡에 착수하지는 않았고 2년 뒤인 1891년 5월 미국의 카네기홀 개관 기념 연주회를 하고 돌아오던 여객선에서 새 교향곡이 될 곡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곡은 파기해 버렸고 이 스케치를 기초하여 1892년 완성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안단테와 피날레’ Op.79를 다시 교향곡의 일부로 전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교향곡으로 하지 않고 1893년에 단일 악장으로 하는 피아노 협주곡 3번 Op.75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음악학자 보가티료프(Semionvich Bogatyriov, 1890~1960)는 이 두 곡과 다른 작품을 보충하여 교향곡 7번이라고 발표하기도 한다. 이렇게 교향곡 6번은 5번에서 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1892년 12얼 차이코프스키는 파이에서 조차인 다비도프(Vladmir Davidov, 1871~1906)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교향곡의 구상이 떠올랐다. 이 교향곡은 표제설이 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비밀이며 상상에 맡기겠다. 이 표제성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나는 여행 중 머릿속으로 작곡하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中略- 마지막 악장은 장엄한 알레그로(allegro)가 아닌 조용한 아다지오(adagio)가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893년 또 다시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여행 중 이 곡을 쓰면서 여러 번 울었다. 나는 이 곡을 뛰어난 곡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나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쓴 그 어떤 곡보다 나는 이 곡을 사랑한다. 그러나 최후의 교향곡을 완성하는 것이 나 자신의 진혼곡(requiem)과 같은 기분이 드는 것에 당혹감이 들곤 한다”라고 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교향곡은 그의 최후의 작품인 교향곡 6번인데 이렇게 하여 곡은 그해 8월쯤에 완성되었다.

초연은 1893년 10월 28일 성 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자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곡은 청중에게 전혀 이해되지 못했으나 작곡가에 대한 예의상 갈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곡의 초연 후 차이코프스키는 아우인 모데스트(Modest Tchaikovsky, 1850~1916)와 의논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교향곡을 그냥 6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어떤 표제적인 내용을 갖지 않을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데스트는 한참을 생각하다 <비극적(tragic)>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러자 차이코프스키는 반대를 하였다. 이에 모데스트는 <파테티끄(pathetique)>를 생각해 내고 차이코프스키도 이것으로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 제목은 불어인데 이런 배경으로는 어린 시절 차이코프스키가 프랑스인 가정교사인 뒤르바흐에게 프랑스어를 배워 시를 쓸 정도로 능통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역시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한편 프랑스어로 ‘파테티끄’는 ‘비장감(pathos-passion), 감동적인, 감격적인’의 뜻인데, 비창(悲愴)이란 한자어는 ‘슬프고 아픈 마음’을 말한다. 물론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오히려 곡의 분위기를 더욱 북돋우는 매우 적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곡의 헌정은 그의 조카인 다비도프에게 하였고 초연 9일 뒤인 1893년 11월 6일 차이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마치 그의 레퀴엠과도 같은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추측이지만 음악적 흐름에서도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기도 하며 그가 동성애로 인한 자살 강요를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1월 18일 <비창> 교향곡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명지휘자 나프라브닉(Eduard Napravnik, 1839~1916)에 의해 재 연주되었을 때 연주회장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헌정자인 다비도프는 35세에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곡은 순수한 표제음악은 아니며 차이코프스키 자신이 이 교향곡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나타내려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작곡 중 스케치에 의하면 ‘이 교향곡의 주도적 핵심은 인생이다’라고 하여, 첫 악장은 <열정>, 두 번째 악장은<사랑>, 세 번째 악장은 <실망> 그리고 마지막 악장은 <소멸>이라고 적고 있다.

이 교향곡은 인생의 공포, 절망,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반대되는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비창적 정서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4악장의 조용히 사라지는 극히 온건한 속도의 연탄적이고 비통한 느낌은 죽음에 대한 그림자의 엄습을 짙게 그려내고 있다.

이 곡은 여러 가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워낙 유명한 것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음악적 내용일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긴간의 나약한 운명을 음악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로 비창이란 숙명이며 이것을 극복하려고 3악장 같은 곳에서는 행진곡풍으로 타란텔라(tarantella)와 같은 격렬함으로 발버둥을 쳐보기도 하지만 결국 4악장에 이르러 조용히 인간의 숙명적인 종말을 고하고야 마는 죽음을 그린 음악인 것이다.

러시아의 비평가 스타소프가 말한 “낙담과 절망의 무서운 통곡,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던가”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또한 이런 것은 작곡 당시 제정 러시아를 휩쓸고 있던 무겁고 답답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살아가던 민중의 슬픔이나 괴로움이 인간의 숙명과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할 것이다.

특히 귀족이나 정부 고관들은 매우 호화스런 생활을 누렸지만 일반 대중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체호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도 바로 이런 어두운 시대의 공기를 같이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리가 오늘날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이 더없이 비참한 시대에는 오직 예술만이 이 무겁고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두운 문학성이 차이코프스키와 많은 연관성이 있다.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독일)는 ‘예술가는 시대의 아들이다’라고 했듯이 <비창> 교향곡이 단순히 감상적인 음악이 아닌 당시 사람들의 암담하고 비참한 마음을 구원하는 큰 정신적인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