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와 교향곡 제5번
차이코프스키는 청년 시절 한번 지휘대에 섰다가 실패를 한 후부터 거의 지휘봉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오페라 <파로디카(Charodeyka)>를 지휘한 뒤부터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에 1887년 47세에 유럽 각지를 돌려 자신의 작품을 지휘할 기회를 갖는다. 독일에서는 브람스를, 프라하에서는 드보르작을 만나는 등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를 가짐과 동시에 그의 연주회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런 것이 아마도 그로 하여금 새로운 교향곡 창작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던 것이며 연주회를 마친 1888년 교향곡 5번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이것은 교향곡 4번의 초연이 있은 지 무려 10년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5월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모데스트(Modest Tchaikovsky, 1850~1916)>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지금 지쳐서 아주 둔해진 머리 속에서 어느 교향곡의 소재를 조금씩 모을 생각이다”라고 했고, 다음 달 나데츠타 폰 메크(Nadezhda von Mekk, 1831~1894)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선 “제가 교향곡을 하나 작곡할 것이라고 전했던가요? 시작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영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여하튼 두고 볼 일이겠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8월에 보낸 편지에서는 “교향곡의 절반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노인도 아닌데 나이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쉽게 지칩니다. 전과는 달라서 피아노를 칠 수도, 책을 읽은 일도 하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그리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향곡 5번을 완성하였던 것 같다.
곡은 같은 해 8월 완성되어 11월에 자신의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교향곡을 지휘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기도 했다. 이런 초연은 청중의 반응은 좋았지만 언론의 평은 좋지 않았다. 또한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은 무언가 역겨운 것이 있습니다. 요란스럽게 치장한 색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조잡한 불성실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있어 차이코프스키 자신도 이 곡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1월 모스크바, 3월 함부르크에서 열린 자신이 지휘하는 연주회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곡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곡은 4번 교향곡에 비해 더욱 진보된 것이나 당시 평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사상이 없고 예스럽다. 음악의 균형을 무시한 채 음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라고 하였고 심지어는 ‘3개의 왈츠를 가진 교향곡’이라는 혹평도 있었는데 이것은 3악장 왈츠(valse)와 나머지 악장 즉 1, 2악장을 두고 한 말이다.
또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 독일)는 2악장을 정서의 쓰레기라 하면서 영화 음악의 범주에 넣고 있다. 물론 악의에 찬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주의의 원천은 흔히 오페라라고 하는데, 2년 뒤 만든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The Queen of Spades)> 서곡에 교향곡 5번 1악장의 주제를 다시 쓰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런 무곡풍이 교향곡은 제국 스타일의 극치인 작품 <잠자는 숲 속의 미녀>나 <호두까기 인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향곡 5번은 4번이나 6버너에 비해 연주 효과를 노린 작위적인 장황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보완하고도 남을 서정적인 아름다운 선율과 구성의 단단함 그리고 격정적이며 현란한 쾌감도 전해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4번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차이코프스키가 말한 ‘운명입니다. 행복을 얻으려는 행보를 가로막는 운명의 힘입니다. ···삶이란 침침한 현실과 떠다니는 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인데, 이런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만한 것입니다’라는 삶의 주제가 5번 교향곡에도 적용되고 있다.
한편 곡에 대한 차이코프스키가 초고 악보 옆에 남긴 글을 보면 ‘제1악장 프로그램=서주, 운명, 또는 헤아릴 수 없는 신의 섭리에 의한 완전복종’, ‘알레그로 1, XXX에 대한 불평, 의심, 애원, 비난, 2, 운명의 포옹에 내 몸을 맡길까??? 쓸 수만 있다면 멋진 프로그램일텐데’란 것인데, 4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운명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악장은 반 데어 발스(Nikolai van Gilse van der Pals, 1891~1969)가 말한 사무치는 그리움의 노래라고 한 것인데, 차이코프스키의 글은 ‘위로, 한 줄기 빛, 없다, 희망은 없다는 대답 아래’이다. 전편을 꿰고 있는 무겁고 검은 색조와 같이.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