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String Sextet
in d minor Op.70 (Souvenir de Florence)
Borodin Quartet
Rostislav Dubinsky (violin)
Yaroslav Aleksandrov (violin)
Dmitiri Shebalin (viola)
Valentin Berlinsky (cello)
Genrikh Talalyan (viola)
Mstislav Rostropovich (cello)
녹음 : 1964 Stereo Moscow
여행이 주는 그리움
차이코프스키 : 플로렌스의 추억 - 보로딘 현악 4중주단


고전음악과 낭만음악 시대를 주도한 작곡가들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출신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독일이든 러시아든 스칸디나비아든 조국에 대한 자긍심으로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장식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남유럽 지방에 대한 묘한 동경과 향수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 태도는 그들의 음악세계에 부족했을지도 모르는 따뜻한 체온과 멋진 낭만성을 어느 정도 채워주었다. 유럽 문화의 뿌리는 결국 기독교 문화와 그리스 로마 문화가 아니던가? 그런 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남유럽, 특히 음악과 미술과 건축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적지 않은 작곡가들이 작은 골방에서 오선지를 채우던 힘든 무명시절을 보내고,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생기면 오랫동안 그리워해오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음악가들의 이탈리아에 대한 호감은 단순한 여행의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도 허다했다.

브람스는 이탈리아를 좋아하여 수차례 여행을 하였으며, 특히 베네치아를 사랑하였다. 도도한 독일우월주의자로 보였던 바그너 역시 이탈리아를 좋아하여 따뜻한 반도를 자주 방문했다. 몇몇 주요 작품들은 이탈리아의 휴양지에서 작곡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멀리 시칠리아까지 여행하였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베네치아에서 맞이하였다. 멘델스존도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그 인상을 담아서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를 발표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 역시 <이탈리아 기상곡>을 작곡하였다.

괴테가 쓴 자전적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는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시(詩)가 나온다. 바로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이라는 유명한 시이다. 이 시는 토마의 오페라 <미뇽>에도 나와 여주인공의 아름다운 메조소프라노 음성으로 노래된다.
무화과 꽃이 피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검은 잎으로 된 금빛 오렌지가 열려 있고,
도금양 나무는 조용히, 월계수는 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
큰 방들은 번쩍번쩍 빛나고,
대리석으로 된 조각들이 나를 응시하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
붉은 꽃들이 가득하고 가로수에도 오렌지가 달려 있으며, 집들은 독일처럼 나무가 아니라 대리석으로 지어졌다고 괴테도 찬탄을 금치 않았던 나라가 이탈리아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이탈리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가졌는지는 그가 <이탈리아 기상곡>을 작곡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또 다른 명작 <플로렌스의 추억>을 남겼다.

<플로렌스의 추억>은 현악 6중주곡이다. 그러나 원제(原題)에 곡의 장르를 말해주는 표기는 없다. 다만 <플로렌스의 추억>이라는 말만이 이 고색창연한 고도(古都)에 대한 차이코프스키의 깊은 인상을 전해주고 있다.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어식 표기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 곡에는 플로렌스란 말이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처음 이 곡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그 먼 이국의 도시는 그 도시를 가장 선호하고 동경했던 영국인들이 부르는 ‘플로렌스’란 제목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플로렌스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불려온 이 현악 6중주곡은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플로렌스의 추억’일 뿐이지, ‘피렌체의 추억’으로는 도무지 나의 마음을 열지 못하였다.


피렌체 시가지의 아름다운 풍광은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향수의 대상이다.

국내에도 개봉되어 피렌체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동경의 대상을 만들어준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경이 은은한 색체로 펼쳐진다. 과연 피렌체는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이고 낭만과 추억을 가진 도시로 다가오는가 보다. 추억의 이탈리아 영화 <베를린 청사의 시>에는 피렌체의 아름다운 숲들이 펼쳐지고 영화 <전망 좋은 방>이나 <무솔리니와 차(茶)를>에도 피렌체 시내와 주변의 매력이 멋지게 잘 그려져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기학자들이 차이코프스키의 발자취를 조사해본 결과,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에 피렌체에 들른 적은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이다. 여행에 흥분한 차이코프스키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취했던지, 아마도 다른 도시들을 방문하고서 피렌체에 간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플로렌스의 추억>이라는 이 곡의 제목부터가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플로렌스의 추억>은 그동안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낭만적인 정서를 그린 추억의 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니 이 곡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플로렌스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플로렌스의 추억> d단조 작품 70은 여섯 갱의 현악기가 연주하는 현악 6중주곡이다. 곡의 구성은 기존의 현악 4중주곡을 이루는 현(絃) 4부에 비올라와 첼로가 하나씩 추가된 형태로서, 각각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연주하는 형태이다.

이런 형태의 구성은 현악 4중주곡보다 중저음이 강화되어 있어, 무게감이 더 크다. 이에 따라 보다 깊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데, 이런 구성의 곡으로는 브람스의 현악 6중주 제1번과 제2번이 더 유명하다.

<플로렌스의 추억>은 모두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형적인 현악 4중주곡의 형식과 거의 유사하다.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악장은 바로 제2악장이다. 이 노래하듯이 흐르는 아다지오 칸타빌레 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의 우아한 선율이 피렌체의 어느 골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올라와 첼로가 피치카토를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바이올린은 피렌체에서 가만히 담아온 공기를 쏟아내듯이 우리의 심증을 향해 그 서정적인 멜로디를 노래해 나간다. 이 느린 악장의 느낌이 바로 이 곡의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린다.

다른 악장들 역시 매력적이다. 제1악장은 피렌체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의 눈앞에 두오모(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경이롭게 나타나 가로막듯이, 가슴을 때리는 듯 흥분되는 울림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여행자가 이 도시의 매력을 하나씩 음미하듯이 제1주제와 제2주제가 차례로 펼쳐진다.

제3악장의 알레그레토 모데라토는 농민들이 춤을 추는 듯한 즐거운 무곡풍인데, 그것이 이탈리아에서 포도를 따는 농부들을 연상시키든(학자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러시아에서 귀리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떠올리게 하든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제4악장은 고전적 구조의 품격이 느껴지는 소나타 형식의 피날레로, 비바체로 달려가는 박력이 장대함을 더하면서 곡을 마무리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실내악곡 연주로는 그 실력과 권위에 있어 역시 러시아가 자랑하는 보로딘 현악 4중주단(Borodin Quartet)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이 악단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8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동료들이 함께 만든 단체이다. 그들은 5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자들이 몇 번 바뀌는 변화 속에서도 소련을 대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현악 4중주단으로서 세계적인 서방의 4중주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왔다. 특히 그들은 러시아 음악, 즉 차이코프스키나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곡들에서 빼어난 성과를 올렸다.

<플로렌스의 추억> 역시 보로딘 4중주단의 연주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보로딘 4중주단에 의해 이 곡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연주하는 <플로렌스의 추억>은 유명한 것만 손꼽아도 세 종류나 되는 음반이 있다. 그들이 이 곡을 연주할 때는 네 사람의 멤버 이외에 두 명의 다른 연주자가 참여하는 형태를 취한다.

즉 겐리히 탈라얀(Genrikh Talayan, 비올라)과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첼로)가 참여하여 함께 연주한 1965년의 녹음(멜로디아 - BMG, 멜로디아 - 아울로스)을 위시하여, 유리 바슈메트(비올라)와 나탈리아 구트만(첼로)이 함께한 1979년 녹음(멜로디아 - EMI), 그리고 유리 유로프(비올라)와 미하일 밀만(첼로)이 함께 연주한 1993년의 녹음(텔덱)까지 있다.

위의 세 음반들은 차이코프스키가 쓴 세 곡의 현악 4중주곡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전집 형태로서 전부 두 장의 CD로 되어 있다. 즉 현악 4중주곡집 안에 <플로렌스의 추억>이 들어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4중주단의 멤버들은 여러 번 바뀌어 세 음반들 모두 연주자들이 다르긴 하지만, 보로딘 4중주단이라는 이름이 손상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거장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참여한 1965년의 구반(舊盤)이다. 지금 세계 최고의 솔리스트가 된 로스트로포비치는 2차대전 직후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첫 멤버의 한 명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함께 창설했던 보로딘 4중주단이 20년이 되던 해인 1965년에 젊은 날의 추억의 팀에 참여한 것이다.

이 녹음에서는 여섯 명의 주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러시아 실내악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늙어버린 과거의 음악 친구들이 다시 모여서 만들어내는 화음은 서정과 걱정이 어우러진 차이코프스키 실내악의 정수이다. 그들은 분명 플로렌스의 추억이 아닌 20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함께 했던 모스크바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참으로 기쁘고 감회 어린 마음으로 이 녹음을 준비했을 것이다. 구소련 시절에 나온 이 음반에서 여섯 명의 연주자들은 <플로렌스의 추억>을 빌려서 회한과 낭만을 아낌없이 내뿜고 있다.

누구나 여행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짧은 순간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이 때로는 일생 동안 함께 가기도 한다. 음악 역시 추억에 젖어서 쓰인 곡이 우리 마음에 쉽게 젖어들어 잊혀지지 않는다.

글 출처 :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시공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