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이야기
교향곡 제5번의 초연자인 므라빈스키(Evgeny Mravinsky)의 연주는 이 곡에 대한 공산주의 체제에 있던 당시 러시아 지휘자들의 연주가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 큰 답이 되고 있는 명반이다.
과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 6, 8, 10, 11, 12번을 초연 할 만큼의 권위를 가진 므라빈스키의 연주는 어떠한가? 그의 연주는 굴복도 아니요, 적절한 타협도 아니다.
또한 숨겨진 항거를 통한 극복 역시 결코 아니다. 그의 연주의 핵심은 음악 자체의 순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푸쉬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이 말한 ‘순수하고 타락하지 않은’ 바로 그것이다. 그저 단순한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바라 본 음악의 숨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이분법적인 체제를 들먹일 필요도 없으며 므라빈스키라는 위대한 지휘자 예술적 활동 역시 공산주의라는 파상적 개념 속에 포함시킬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므라빈스키 해석 역시 앞서 언급한 곡에 대한 작곡가의 의중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즉 사회주의, 예술가의 항거, 다시 사회주의로 회귀하여 결국 남은 것은 음악 자체가 된다는 단순한 것이다.
므라빈스키는 1937년 11월 21일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 축제의 일부로 레닌그라드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곡을 초연하였다. 녹음은 남아 있지는 않으나 이 연주를 들은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기쁨과 행복감이 충만하여 봄바람과도 같은 감흥이 넘쳐흐른다’고 절찬 하였다.
또한 당시 연주회장의 분위기는 ‘기립 박수의 광란’이라고까지 전해진다. 이렇듯 청중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숨겨진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음악의 추상성이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후 므라빈스키는 이 곡을 수 없이 연주하였고, 남아 있는 녹음은 모두 9회로 알려져 있다. 1938년 레닌그라드에서 첫 녹음을 비롯하여 54년 레닌그라드, 65년 레닌그라드 실황, 66년 레닌그라드 실황, 67년 프라하 실황, 73년 레닌그라드 실황, 73년 도쿄 실황, 78년 빈 실황 그리고 마지막인 84년의 레닌그라드에서의 실황이 그것으로 무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이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해 1954년에 녹음된 것인데, 모노 녹음이라 다소 아쉽기는 하나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최고의 연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연주는 서방세계인 빈에 모습을 드러낸 소중한 실황이기도 하자. 이렇듯 어느 것이나 훌륭한 연주이지만 편의상 여기서는 연주 완성도와 음질상으로 가장 나중 연주인 1984년 연주를 추천하고자 한다.
실황 녹음이라 1악장이 다소 흐트러지고 이전에 비해 다소 격정을 덜해 이지적인 연주가 되고 있지만, 4악장의 인간의 비극을 극복하는 극적 해방감은 여타 연주를 능가하는 절정을 이루어 최상의 연주가 되고 있다.
전편에 펼쳐진 특유의 확신에 찬 슬라브적 강렬함은 여전히 생생하고, 작곡자의 심경을 토로하는 설득력 넘치는 해석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이다. 고뇌·극복·환희로 이어지는 곡상을 무서운 집중력과 박력의 긴장감으로 이끌어 간 참으로 대단한 경지를 보인다.
그리고 전곡에 흐르는 냉철한 기운의 음색이 사회주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나, 이것이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제정 러시아에서 소련 공산주의 체계로 이어지는 단순한 사회적인 배경일 뿐, 쇼스타코비치라는 한 음악가의 순수한 예술성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음악 그 자체인 것이다. 바로 이런 궁극적인 경지가 므라빈스키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그 생생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가 말한 인간성의 회복으로.
음반은 <므라빈스키 실황 녹음(FRATO, HCD)> 시리즈 중의 하나로 그가 작고하기 4년 전의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료출처 : 불후의 명곡(허재, 책과 음악)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