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과 바이올린 협주곡
슈만의 창작은 독일의 이상주의와 완벽주의에 입각한 걸작을 늘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낙담, 이상과 현실 즉 한계를 드러낸 자신의 재능에 대해 견디기 힘든 우울증과 폐쇄증을 나타내었다.

이런 슈만은 만년에 환청에 의한 정신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1853년 9월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에 착수 10월초 완성하게 된다.

그는 이미 1851년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Op.105. 121)를 썼으며, 1853년에는 바흐 바이올린 소나타를 편곡하기도 하며 작곡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헝가리)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1855년 5월에 뒤셀도르프에서 듣고 크게 감명 받아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Op.131과 바로 이 d단조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

또한 요아힘과의 우정으로 그의 모토인 'Frie aber einsam'의 를 슈만, 브람스, 디트리히가 공동으로 작곡하기도 하였다. 훗날 슈만은 이 작품의 다른 이들이 만든 악장을 스스로가 다시 작곡하여 그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WoO 27로 발표한 바 있다.

슈만은 이렇게 작곡된 바이올린 협주곡을 요아힘에게 초연을 부탁하고 악보를 전하였으나, 요아힘은 곡이 바이올린에 너무 치중되어 있고 기교적으로 화려하나 연주 효과가 거의 없을 것이며, 환상성도 난해한 것이라고 치부하여 초연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것이다. 또한 요아힘의 전기 작가인 모저(Andreas Moser)는 요아힘이 편지에서 이 곡에 대해 “마지막 정신적인 영감을 쥐어짜듯 극도로 고갈된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 작품 이후 슈만은 정신이상이 더욱 심해져 더 이상 작품을 쓰지 못하고 1854년 2월 초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였다. 그 후 2년간 폐인이 되어 병으로 고생하다 1856년 결국 본 근교의 엔데니히(Endenich) 정신 병원에서 그리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작품은 미망인 클라라와 브람스가 함께 출판한 슈만의 전 작품집 출판에도 제외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곡은 더욱 철저히 숨겨지게 되었고,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는 무려 8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20세기를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곡은 전 3악장으로 작곡가 만년의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전편을 지배하는데, 특히 노래하는 듯한 악구는 마치 죽음의 주제와도 같은 것이다. 슈만은 이런 주제를 작곡 이듬해 1854년 2월 17일 밤 -환상으로 가득 찬 고통스러운 나날들 중 어느 밤- 그를 위하여 천사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제는 최후의 >창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 사용(브람스 Op.23에도 사용됨) 되었고 이를 정리한 수첩을 집에 남겨둔 채 라인강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환영이 그를 라인강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곡은 이런 비운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유작으로, 비극적인 열정과 처절한 절망, 절규와 광기에 가까운 애절한 선율은 슈만의 정신적 고뇌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천재 작곡가의 이상과 좌절은 빛나는 환상 속에 숭고한 아름다움과 쓰라린 절망감이 끊임없이 교차하였던 것이다. 이런 내면의 깊은 정신적 갈들을 요아힘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단순한 지루함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다. 결국 한 천재 작곡가의 눈부시게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너무도 강렬한 내면세계가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고 말았던 것이다.

곡 자체는 구성이 약하다고 평가되기도 하나, 도처에 슈만다운 아름다움이 발견되며 나름대로 짜임새와 베토벤적인 장중함도 엿볼 수 있어 기구한 운명의 숨겨진 명곡으로 자리한다. 또한 작곡가 만년의 중요한 작품이자 낭만파 시대의 귀중한 협주곡으로 평가된다.

악보는 슈만이 죽은 뒤 백 년 동안 발표하지 말라는 요아힘의 유언과 함께 그의 아들 요하네스(Johannes Joachim)에 의해 베를린의 프로이센 국립 도서관에 이관되어 그대로 사장된다. 그런데 1933년부터 요아힘의 조차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라니(Jelly d'Aranyi, 1895~1966, 헝가리)와 파치리(Adila Fachiri, 1889~ ?)가 슈만의 영적인 목소리(Spirit voice)에 의해 프로이센 박물관에서 악보를 찾아냈다는 조금은 믿기 힘든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이들 중엔 토베이(Donald Francis Tovey, 1875~1940, 영국)와 같은 평론가도 있었다. 말하자면 슈만이 죽기 전 유언과도 같은 작품을 남기었으나 이것이 요아힘으로 인해 발표가 되지 않자 사후 슈만의 영적인 목소리가 요아힘의 조카들에게 전해져 그녀들의 손을 통해 슈만 사후 백년이 채 되기 전에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된다는 마치 전설과도 같은 일화인 것이다. 더욱이 이런 발굴에는 영국 정부와 BBC, 그리고 독일 나치까지 가담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 1937년 도서관 음악부장 슈네만(Georg Schunemann, 1884~1945)이 초고와 요아힘의 피아노 사보 악보를 참고하여 완전한 개정판 악보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악보는 나치의 눈 밖에 난 작곡가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 독일)가 비밀리에 손을 본 것인데 특히 3악장 ‘생기 있게 그러나 빠르지 않게(Lebhaft, doch nicht schnell)'를 수정하였다.

원래 슈만이 이 악장에 명시한 템포는 메트로놈(Metronome) 4분 음표=63이다. 사실 이런 템포로 지시와 같이 생기 있지만 빠르지 않게 연주하기란 매우 곤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요아힘의 지적처럼 연주 효과도 좋지 않아 연주되지 못하고 방치된 이유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한다.
결국 힌데미트의 덕분에 일반적인 협주곡처럼 2악장은 느리고 3악장은 빠르게 그나마 연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슈만이 3악장에서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사실 4분의 3박자의 포로네즈(polonaise)였다. 만약 이렇게 연주한다면 템포가 늦어져 그가 원한 ‘빠르지 않게’가 되나 ‘생기 있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결코 연주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