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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 Marcelle Meyer (1899 ~ 1958)
프랑스의 여류 피아니스트.
마르셀 메이어는 프랑스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있는 연주가이다. 그녀의 연주는 우아하고 차분하며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녀가 남긴 음반은 희귀하기로 유명하며, 특히 라모, 스카를라티 및 프랑스곡 연주에서 좋은 음반을 남겼다.

특히 클래식 음반 수집가들에게 수집대상이 되고 있는 프랑스 "LES DISCOPHILES FRANCAIS" 레이블에서 발매된 바흐의 파르티나 음반, 스트라빈스키 피아노 소품집, 스칼리티 리사이틀 음반은 현재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마르셀 메이어는 1899년 5월 22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언니 Germaine로 부터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고, 알프레도 코르토, 마그리트 롱, 리카르도 비네에게 사사했다.

특히 당대의 하프시코드 연주의 전설적인 인물인 완다 란도프스카에 비견되는 바흐의 키보드 음악의 대가로서 평가받았던 연주자였다. 그녀는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플랑과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현대음악가들의 피아노 작품들에 뛰어난 권위자로도 활약하였다. 또한 다리우스 미요와 플랑은 메이어에게 자신들의 작품을 헌정하기도 하였다.

마르셀 메이어는 에릭 사티와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1923년 에릭 사티의 피아노 소품집을 프랑스에서 초연하기도 하였다. 메이어는 193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Pathe(HMV레이블)에서 모차르트, 스칼리티, 바흐의 피아노 작품들을 녹음하였다.

1940년 액상 프로랑스 음악 페스티발에 참여하여 사를 문쉬의 지휘로 프랑크의 "교향곡 연습곡" 을 협연했고, 슈만, 모차르트, 슈베르트, 바흐, 스칼리티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1940년대 그녀는 동료 피아니스트 이브 낫트(Yves Nat)와 서로 음악적 교류를 갖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반 유럽을 비롯한 남미, 미국, 남아공 등을 방문하여 음악회를 갖기도 하였고, 또한 프랑스의 Les Discophiles Francais 레이블에서 몇장의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남아 후진 양성에 열정을 쏟았다.

메이어의 연주 스타일은 디누 리파티, 샹송 프랑소와, 그리고 러시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소콜로브에게 영향을 미쳤다. 메이어는 1958년 사망하였다.

출처 :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
Jean-Philippe Rameau(1683 ~ 1764)
바로크 말기 프랑스의 작곡가. 오늘날에는 하프시코드 음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생전에는 음악이론가와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라모의 아버지 장은 디종의 여러 교회에서 42년 동안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으며, 아들이 법률가가 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아들의 참담한 학교 성적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17세 때 젊은 미망인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는 라모의 편지가 문법이 엉망이고 철자법도 실수투성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언어 능력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훗날 그가 쓴 이론에 관한 글들이 여전히 장황하다는 사실로 판단해보건대 그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려 결정한 후 18세 때 이탈리아로 갔지만 밀라노 외에는 가보지 못했다. 이듬해 프랑스 중부 아비뇽, 클레르몽, 리용, 디종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파리에도 잠시 체류했으며, 이미 세련된 하프시코드 모음곡 A단조 "클라브생 소곡집(Premier livre de pieces de clavecin)"(1706)을 출판한 상태였지만 이 시골뜨기 오르간 연주자를 즉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라모가 가장 좋아했던 유명한 오르간·하프시코드 연주자 루이 마르샹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15년경 클레르몽으로 되돌아와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는 계약서에 사인한 후 29년간 그곳에서 일했는데, 그동안 그는 매우 독창적이고 철저한 방법으로 화성의 기초를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자신과 비교적 가까운 시대 사람이었던 16세기 이탈리아인 조세포 차를리노를 포함한 "옛날 사람들이 화성을 음악의 출발점으로 보지 않고 화성규칙이 선율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생각했다" 는 근거에서 전통적 화성이론을 공격했다.

자연 배음렬에 바탕을 둔 이론을 연구한 그는 대부분의 20세기 화성학 교과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화성체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의 화성체계는 체계적 실험에 의해서가 아닌 직관적 방식에 의해 얻은 것이었다.

1722년 "화성론(Traite de l'harmonie)" 을 파리에서 출판한 뒤 명성을 얻었고, 그후 파리로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클레르몽 교회 관계자들은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저작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러한 방해를 넘어서 그곳을 벗어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완강한 인격과 고집스럽고 외곬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저녁 예배 때 교회 관계자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오르간의 가장 듣기 싫은 스톱(음전)을 잡아다니고 가장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연주하여, "이처럼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라모뿐일 것" 이라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동을 거치면서 계약 상태에서 벗어나자 그는 너무나 우아하고 화려하게 힘과 조화를 지닌 연주를 하여 회중의 마음에 자기가 원하는 모든 느낌들을 불러일으켰으며, 따라서 모두가 라모를 잃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이로써 라모는 파리로 돌아와 새롭고 활동적인 삶을 시작했고 이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제2하프시코드 곡집 "손가락 기법을 위한 클라브생 소곡집(Pieces de clavecin avec une methode pour la mecanique des doigts)"(1724)을 내놓아 1집보다 훨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인기있는 클라브생 선생이 되었다.

페어 극장의 부수 음악을 쓰는 계약을 맺게 됨으로써 성공적인 극음악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1725년 이 극장들 가운데 1곳에서 2명의 루이지애나 인디언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받아 라모 최고의 걸작 "야만인(Les Sauvages)" 이 나오게 되었다.

이 작품은 후에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Les Indes galantes)"(1735 초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42세의 나이에 19세의 가수와 결혼했다.

그녀는 이후 라모의 여러 오페라에 출연했으며 4명의 자식을 낳았다. 당시 라모는 프랑스의 최고 부호이자 최대의 음악후원자였던 르 리셰 드 라 푸플리니에와 알게 되었다. 그는 라 푸플리니에의 뛰어난 개인 관현악단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2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며, 재능있는 라 푸플리니에 부인의 음악 교육도 맡았다.

라모 일가는 라 푸플리니에의 대저택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여름에는 파시에 있는 성에서 보냈다. 후원자와 작곡가라는 이상적 관계는 라 푸플리니에가 아내와 헤어지며 끝이 났고, 마침내 라모 대신 젊고 참신한 작곡가 카를 슈타미츠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라 푸플리니에 가문에서 인정을 받은 덕분으로 여러 저명 문학인들과 알게 되었다. 1732년 라모는 그 가운데 아베 펠레그랭(라모의 경쟁자 미셸 피놀레 드 몽테클레르의 성공작 "주피터(Jephte)" 의 대본에 따라 그의 최초의 오페라이자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e)" 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733년 봄 라 푸플리니에 저택에서 초연되었으며, 이듬해 궁정에서도 공연되었다. 이 작품에 대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앙드레캉프라는 드 콩티 공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전하, 이 작품에는 오페라 10개라도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음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모두를 능가하는 음악가일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작품에 너무 음악이 꽉 채워져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 바티스트 륄리의 오페라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라모의 복잡한 관현악법, 강렬한 반주 레치타티보, 불협화를 일으키기도 하는 풍부한 화성에 당황했다. 그러나 라모 자신은 "우아한 인도" 에서 선배 륄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바 있었다.

"위대한 륄리의 레치타티보에 나타나는 멋있는 악구처리, 절묘한 낭송" 에 대해 칭송했으며, 자신도 "비굴한 모방가" 는 아닐지언정 륄리를 모방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사실 라모의 오페라에서 거의 모든 것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륄리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 풍부한 극적 대조, 화려한 관현악 음색과 특히 전편에 흐르는 감각적이고 구슬픈 선율, 나른한 목가풍의 분위기는 그가 륄리와는 또다른 세계, 다시 말해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로코코 시대의 작곡가임을 알게 해준다.

"이폴리트(Hippolyte)" 초연을 본 사람들 가운데는 위대한 볼테르도 있었다. 볼테르는 라모를 "불행히도 륄리보다 더 많은 음악을 알고 있는 사람" 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볼테르는 곧 라모 편에 서서 훌륭한 대본 "삼손(Samson)" 을 썼다. 이 작품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공연 금지당했지만 실제로는 볼테르에 대한 음모 때문이었으며, 음악은 소실되었다. 훗날 이들이 천박한 궁정 오락을 위해 공동 작업한 작품 "나바라의 여왕(La Princesse de Navarre)"(1745), "영광의 전당(Le Temple de la Gloir)"(1745) 이 현존하고 있다.

"나바라의 여왕" 은 장 자크 루소가 압축하여 "라미르의 축제(Les Fetes de Ramire)"(1745)로 개작한 바 있다. 드니 디드로의 "백과전서(Encyclopedie)" 집필에 함께 참여했던 루소, 장 르 롱 달랑베르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처음에는 열렬한 라모 예찬자였으나 1750년대 중엽에는 점차 이탈리아 음악에 이끌려 라모에게서 등을 돌렸다.

라모도 새로운 이탈리아 음악을 즐겨 "폴림니의 축제(Les Fetes de Polymnie)" 서곡(1745)과 최후의 작품 "Abaris ou les Boreades" 서곡(1764) 같은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이탈리아풍으로 작곡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들이었다.

라모 생애의 정점은 1748 ~ 1754년까지의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1748년 그의 걸작 "피그말리온(Pygmalion)" 을 8일 만에 내놓았으며 동시에 6개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1754년에는 루이 16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오시리스의 탄생(La Naissance d'Osiris)" 을 썼다.

이후 그의 명성은 고전주의라는 새로운 음악 양식이 퍼지자 쇠퇴했다. 청중은 라모의 심각한 정서와 바로크 말기의 풍요한 화성보다는 단순한 화성의 친숙한 선율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출처 : 그대 옆에 뜨는 작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