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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의 순례자가 된 소년
쇼팽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2번 _ 백건우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문화행사만 열리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지방에서는 항상 문화적 갈증으로 목이 마른 상태여서, 전시나 공연이라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그저 좋아서 쫓아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에 지방에까지 큰 공연이 열리게 되었으니, 이름도 거창한 ‘광복 30주변 기념음악회’였다. 유명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전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외국에서 활약하는 유명 한국인 연주자들의 초청 무대였다.

부산에서 협연자로 나선 사람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였다. 그때 이름조차 낯선 그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협주곡을 듣고 떨렸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피아니스트의 진지한 자세에 감동해 그 밤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 백건우의 연주에 감동한 나는 그 후 그에 관한 기사들을 유심히 찾아 읽었다. 마침 그대의 연주가 성공을 거두어, 한 지방신문에 그의 부친이 쓴 ‘나의 아들 백건우’라는 연재물이 게재되었다. 나는 매일 그것을 필독하고 스크랩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집이 유복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가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한 인물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사를 읽고 그가 더욱 좋아졌다.

가장 잊을 수 없는 글은 음악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뉴욕에서 학교를 다닐 때 찍었다는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렸는데, 그 모습은 내 어린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맨해튼의 큰 다리 밑에서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서 있는 흑백사진이었다.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는 우수에 찬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뉴욕으로 유학을 간 이후에 한동안 사진에 빠져 카메라만 들고 도시를 배회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피아노 앞에만 앉아 있던 샌님이 아니라 극도 숱한 방황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맑은 눈빛 속에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터질 듯한 에너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하나씩 들려오는 백건우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보통의 연주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서 더 설렜다.

1970~80년대에 해외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소식은 대개 몇 개의 도식적인 문장에 단어만 바꾸어 대입하면 되는 것이었다. 즉 누가 무슨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거나 혹은 1등 없는 몇 등을 하였다, 아니면 누가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였다, 아니면 누가 어느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였다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백건우만은 달랐다. 그의 소식은 항상 ‘무슨 곡을 어떻게 연주했다’는 식이었다. 그가 라벨의 전곡을 연주했다는 것은 참으로 신성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한 피아니스트가 한 음악가의 전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학구적인 자세나 구도자적인 신념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영광이나 경제적인 이득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많은 노력과 연구를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누구나 할 만한 베토벤이나 쇼팽이라면 또 모르지만 라벨만을 연주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기한 행위로 비쳐졌다. 그의 라벨 연주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피아노 전곡을 음반(함부르크 세온)으로 남겼다.

그것은 긴 순례이 시작일 뿐이었다. 라벨이라는 산을 정복한 그는 또 다른 산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했다. 다음엔 무소르크스키의 전곡으로 콘서트를 열었다. 역시 놀라운 일이었는데, 무소르크스키의 전곡 역시 음반(BGM)으로 내놓았다. 그의 이런 순례는 멈추지 않았다. 한 봉우리를 정복하면 또 다른 봉우리를 올라가는 등산가처럼 그는 꾸준하게 예술이라는 산들을 묵묵히 올라갈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스크리아빈, 리스트, 포레,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등으로 차례차례 옮겨졌다. 이렇게 작곡가의 음악세계를 하나하나 심도 있게 연구하여 집약적으로 연주해내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그리고 연주자가 마음먹는다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기술ㅈ거인 면도 완벽하게 뒷받침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유파(流波)의 예술세계를 다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뛰어난 감각과 넓은 교양적 토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포레 음반(데카)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스키리아빈의 전곡(단테)도 큰 호평을 받았다. 그중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는 1992년 프랑스의 권위 있는 디아파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낙소스)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BGM)도 나왔으며,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오르페오)도 따로 출반되었다.

이제 그는 세계 어디에서나 뛰어나고 진지한 피아니스트로 정평이 나 있으며, ‘건반위의 순례자’로 불린다.

그런 그가 최근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음반을 내놓았는데, 바로 쇼팽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데뷔하면서 가장 선호하는 작곡가가 쇼팽이 아니던가? 우리가 아는 유명 피아니스트들도 쇼팽으로 데뷔했고, 많은 음악가들에게 쇼팽은 마지막 산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첫 등정으로 삼았던 산이다. 이미 수많은 산을 넘은 백건우가 이제야 쇼팽을 녹음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을 일임에 분명했다.

어쩌면 그의 레퍼토리에 이제 쇼팽은 올라오자 않을 것만 같았다. 부조니와 메시앙까지 연주한 그가 쇼팽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가 쇼팽을 연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쇼팽을 쳐왔으며,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갈고 닦았다.

그런 그가 드디어 쇼팽을 녹음한 것이다. 이번에 낸 그의 첫 쇼팽 음악은 그의 스타일대로 쇼팽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들을 전부 담고 있어서, 역시 이 분야에 대한 그의 연구의 결실을 보여준다. 이 곡들은 유명한 두 개의 협주곡을 위시하여 <크라코비아크> Op.14, <화려한 대 폴레네이즈> Op.22, <돈 조반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 <폴란드 민요에 의한 환상곡> 등 모두 여섯 곡이 담겨 있다.

1930년 가을 바르샤바의 한 연주장에서는 고국 폴란드를 떠나는 청년 피아니스트 프레데릭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의 고별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스무 살의 쇼팽은 그 콘서트에서 최근에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 Op.11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콘서트에서는 또한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라고 하는 젊은 소프라노가 독창을 하였는데, 바로 쇼팽이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 소프라노는 쇼팽과 같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후배였는데,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그녀를 생각하면서 작곡한 곡이었다.

특히 2악장의 느린 로만체는 달콤하기 그지없으며, 도취적인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2악장을 쓸 때 쇼팽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낭만적이고 조용하고 감상적인 마음으로 썼다. 나의 즐거웠던 추억들을 생각하며······”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녀와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며, 고국을 떠나는 자신만의 이별 의식이었다. 그렇듯이 이 곡의 서정성은 탁월하다.

쇼팽의 또 하나의 콘체르토인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 Op.21은 실제로는 1번보다도 더 앞선 열아홉 살에 작곡한 것이다. 이 곡 역시 피아노를 다루는 쇼팽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2악장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1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악장의 라르게토의 감미로움은 1번에 뒤지지 않는데, 마치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이 아름답다. 별이 많은 밤에 이 대목을 들어보면, 피아노의 한 흠 한 음이 모두 별을 그려내는 듯하여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이다.

이 낭만적인 두 곡의 협주곡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오케스트라 파트가 빈약하다고 한다. 물론 적절한 평가이다. 관현악 부분에서 역량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쇼팽은 파리로 간 후 더 이상 관현악 곡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스무 살 전후에 쓴 이 협주곡들이야말로 소년처럼 순수하고 열광적인 심정의 적나라한 표현이며, 그가 피아놀ㄹ 다루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곡이기도 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들을 관록의 대가가 된 백건우가 녹음한 것은 그 자체로도 관심의 대상이다. 평생 여러 작곡가들의 세계를 탐구하다가 이제야 대중적이며 기본적인 곡을 연주하는 그에게는 범상한 경지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정신마저 느껴진다.

연주와 녹음 작업은 모두 바르샤바에서 이루어졌고, 안토니 비트(Antoni Wit)가 지휘하는 바르샤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하였다. 그의 쇼팽 녹음은 지극히 섬세하고 회화적이다. 쇼팽의 도시에 와서 그의 심장이 묻힌 성 십자가 교회에서 감상에 젖었던 백건우는 그런 감회를 그림을 그리듯이 연주에 쏟았음이 분명하다. “쇼팽은 반생을 파리에서 살았지만, 그 이전의 절반은 폴란드가 고향이었다”는 그의 새삼스러운 지적처럼, 지금은 파리에서 살고 있는 그도 이 곡을 연주하면서 한국에서의 추억을 떠 올렸을까?

글 출처 :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시공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