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와 피아노 5중주
브람스 음악은 표면을 그을린 듯한 은빛의 이성이라는 테두리(형식)와, 내면의 정열을 순간적으로 내비치는 금빛의 감정(내용)의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실내악 분야라 할 수 있다.
브람스는 그의 나이 29세 때인 1862년 쾰른에서 열린 라인 음악제에 참가한 후 슈만(Robert Schumann)부부가 살고 있는 뮌스터(Munster) 근처 에베른부르크에 머물면서 교향곡 1번의 1악장 초안과 피아노 5중주의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브람스는 작곡에 임함에 있어 보기 드문 신중파였다. 그래서 이 곡도 추고에 추고를 거듭하여 현재의 피아노 5중주로 겨우 탄생한 것이었다.
곡은 처음에 현악 4중주 편성에 첼로가 하나 더 들어간 현악 5중주의 형태였다. 물론 이런 편성은 보케리니, 케루비니, 슈베르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첼로 대신 피아노가 들어간 피아노 5중주의 편성은 보케리니가 최초로 선보인 이래 슈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곡을 완성한 브람스는 당대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헝가리)에게 악보를 보내게 된다. 이에 요아힘은 브람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곡은 분명히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남성적인 힘과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연주하기 어렵다. 그리고 나는 정열적인 연주가 아니면 곡이 불분명하게 들릴 것이 걱정된다······”
라고.
그리고 1년 후 요아힘은 작품의 개작을 종용하기 위해 또 편지를 보내게 된다.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부족한 것은 표현력과 매력이다.”
그래서 브람스는 개작을 하여 빈에서 사적으로 초연 하게 되는데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결국 중량적인 면에서 약한 현악 5중주의 편성을 포기하고 1864년 자신이 좋아하는 두 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고치게 된다.
한편 같은 해 브람스는 바덴바덴에서 그의 현악 6중주 2번의 3악장을 완성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현악에 의한 실내악의 유혹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더불어 클라라(Clara Schumann)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작품(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은 놀랄 만큼 훌륭하고 재기에 넘치는 편성이 놀라운 흥미를 자아내며 어디를 봐도 교묘합니다. ······이것은 소나타가 아니며 꽃과 과일을 담은 그릇처럼 그 악장을 오케스트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멋진 여러 가지 악장이 피아노에서 흩날립니다······”
라고 하였다.
이런 편지에 직접적인 자극을 받은 브람스는 결국 이 작품을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5중주의 장점들 그리고 오케스트라적인 효과를 살릴 수 있는 편성인 피아노 5중주로 최종 개작하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초연은 1865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이루어졌고 헌정을 프로이센 공주인 안나에게 하게 된다. 안나 폰 헤세(Anna von Hesse)는 프로이센의 공주로 음악애호가이자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브람스와는 바덴바덴에서 머물 때 클라라 딸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1884년 이 곡의 전신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클라라와 연주하여 들려준 바 있었다. 이때 이 곡에 안나가 깊은 관심을 보여 곡을 헌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안나는 헌정의 답례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의 자필악보를 브람스에게 주게 된다.
곡은 브람스 창작 2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역작으로, 브람스 그 자신으로서도 이상하리만큼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신중한 추고를 거듭한 실내악사상 그 유예를 찾기 힘든 피아노 5중주의 최고 걸작이라 하겠다.
내용 면에서 본다면 작곡가 특유의 내면적인 정열과 어두움을 바탕으로 한 중량감과 웅대함을 지니고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있어서도 쓸쓸함과 젊음의 활기가 특유의 부드러움 속에서 꿈틀거린다. 특히 피아노와 현악 4중주의 연주 구도가 일대 장관을 이룬다. 또한 구성에 있어서 거대하고 치밀하지만 매우 자연스런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 실내악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