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교향곡 제9번
“쉴러 지음 송가 ‘환희에 붙임’을 마지막 합창으로 한 대관현악, 4성 독창, 4성 합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폐하에게 심심한 경의를 가지고 루드비히 반 베토벤에 의하여 봉정된 교향곡 Op.125" 이것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정식 명칭이다.
이 작품은 베토벤이 도달한 인간 해방의 확신과 희망을 성악과 기악의 융합으로 그려낸 웅장하고 장엄한 규모의 걸작이다.
따라서 베토벤의 전 생애를 통해 축적된 사상과 기예의 종합이라 할 것이다. 이런 만큼 완성까지는 오랜 인고의 시간이 필요로 했다.
베토벤은 독일의 위대한 문호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에 곡을 붙일 것을 이미 본 시대인 1792년부터 생각했다.
쉴러가 이 시를 쓴 것은 1785년 드레스덴의 엘베 강을 굽어보는 포도밭이며 다음 해 자기가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여 본의 청년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당시 쉴러는 26세, 베토벤은 15세였다. 참고로 원래 제목은 ‘환희(Frreude)’가 아니라 ‘자유(Freiheit)’였는데 검열 때문에 고쳤다고 전해진다. 한편 베토벤의 친구이자 본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젊은 시인 피체니히(Ludwig Fischenich, 1768~1831)는 쉴러 부부와 친분이 있었고 그래서 1793년 1월 편지를 통해 베토벤이 <환희의 송가>에 음악을 붙일 것이라는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교향곡에 합창을 넣은 예는 빈터(Peter von Winter, 1754~1825, 독일)가 1814년 작곡한 <전쟁 교향곡>이 있는데, 베토벤의 것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으로 베토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성악이 들어간 교향곡의 효시가 된다.
1809년 제1악장의 스케치를 시작하였고, 1812년에는 곡의 유곽을 드러내면서 1815년에는 2악장의 주제가 쓰인다. 그리고 1818년에는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adagio) 악장에 노래 즉 가사를 가진 합창을 넣기로 한다. 하지만 그 무렵 베토벤은 <독일 교향곡>과 9번 교향곡 두 곡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어느 곡에 성악이 들어갈지는 미정이었다. 그런데 1822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로부터의 두 곡의 교향곡 위촉이 들어왔다. 이에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합창을 넣으려 했다. 특히 <독일 교향곡>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의식 고취라는 측면에서 쉴러의 <환희의 송가>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결국 두 곡을 하나로 통합하여 1824년 제9번 교향곡으로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교향곡은 작곡의 뜻을 품은 때부터 정식 완성까지 무려 약 30년이나 걸린 것이다.
긴 작곡 기간 중 1817년부터 1818년은 특히 어려운 시기였다. 귓병이 더욱 심해져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고, 건강도 매우 좋지 못했다. 더욱이 베토벤에 대한 음악계의 적대적인 분위기도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도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조카 칼(Karl van Beethoven, 1806~1858)의 양육권을 둘러싸고 칼의 생모와 재판까지 벌이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탄생한 9번 교향곡은 생애의 마지막 단계인 대벽화를 위해 유언과도 같이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인성(人聲)인 <환희의 송가>를 넣고 있는 것이다.
초연은 베토벤이 빈 시민에 대한 불만으로 베를린에서 할 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빈 시민의 호응에 힘입어서 빈에서 연주회를 열게 된다. 1824년 빈의 케른트네르 극장에서 열린 이 음악회의 연주곡목은 서곡 <명명축일> Op.115, <장엄미사> Op.123 중 <키리에>, <크레도>, <아뉴스 데이>의 3개 악장과 이 9번 교향곡이었다. 연주는 연습이 부족하여 좋은 것이 아니었으나 청중들의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지휘는 베토벤 자신이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움라우프(Michael Umkauf, 1781~1842, 오스트리아)와 악장 슈판치히(Ignaz Schuppanzigh, 1776~1830, 오스트리아)가 한 것이다.
연주가 끝난 후 열광하는 청중의 소리를 베토벤은 이미 청각을 거의 상실한 때라 들을 수 없었다.그래도 알토 독창을 맡는 성악가 웅거(Karoline Unger, 1803~1877, 오스트리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서 있는 베토벤을 청중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청중은 더욱 갈채를 보냈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이 광경을 쉰들러(Anton Felix Schindler, 1795~1864, 독일)는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 계속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악장은 우주의 창조를 알리는 것과도 같은 도입부의 장엄한 울림 그리고 투쟁적인 진행은 고전 분투하는 온갖 어려움 속의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극적이며 침통한 영혼의 절규라 할 것이다.
2악장은 절망에 쫓겨 행복을 찾으려하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3악장은 바덴의 자연을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아다지오로 마치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명상과도 같은 베토벤만의 숭고한 서정이다.
4악장에 이르면 인간적인 한 편의 대드라마가 장려하게 펼쳐지게 된다. 이 감동적 체험은 그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모든 듣는 이의 가슴에 벅찬 감동을 짙게 선사할 것이다. 특히 중간 부분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인간적 체념의 순간에서 일순간에 비상하여 승리를 구가하며 외치는 환희는 참으로 현언하기 힘든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천상의 소리를 듣는 순간이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장엄한 순간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