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교향곡 제8번
이 곡을 구상한 것은 1811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것은 <교향곡 7번>을 완성한 이후인 7월부터로, 테플리츠에 머무르면서 활기차게 작업을 진척시켰다.
당시 베토벤은 두 번째로 테플리츠에 체류하는 것이었기에 한층 그 곳에 친숙해있었다. 이렇게 씌여진 이 교향곡은 밝고 명랑하며 베토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장중하지 않으므로 낭만적인 경향을 띄고 있기도 하다. 곡을 완성한 것은 1812년 10월. 동생의 결혼으로 린츠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여러 가지 불쾌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곡은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
이 곡은 밝고 명랑하다는 점에서 <교향곡 7번>과 비슷하지만 그 곡과 같은 힘이 열기, 심각함은 없다. 그 때문에 이 <교향곡 8번>은 지금까지의 교향곡보다 창작력이 후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추구하여, 교향곡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단도 직입적으로 간결하게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교향곡 3번> 다음으로 <교향곡 4번>을 작곡한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2악장의 주제로, 리듬을 새긴 듯한 이 주제는 메트로놈
(주: 음악의 빠르기를 재는 기구) 소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 메트로놈은 요한 네포우크 멜첼(1772~1838)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멜첼과 그의 동생 레오나르트 멜첼(1783~1855)은 1812년 초쯤에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형 요한은 <웰링턴의 승리>를 베토벤에게 위촉하여 큰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베토벤을 위해 보청기를 만든 것은 동생 멜첼이었다). 그가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크로노미터라는 장치를 만들면서부터이다.
1813년 10월13일 비엔나의 한 신문에 이 크로노미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멜첼 씨는 기계와 음악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에서 유명한 작곡가나 음악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기계를 개선하여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멜첼 씨는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으며, 최근 전시되었던 견본으로 비엔나의 작곡가들을 만족시켰다. 이것은 곧 국내의 여러 작곡가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다.
이 견본은 작곡가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기로베츠, 후멜이 다양한 테스트를 했다. 궁정 악장 살리에리는 우선 하이든의 <천지창조>에서 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보았다. 그리고 악보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다양한 템포를 맞출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템포가 자주 잘못 이해되는 것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발명품으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는 템포로 화려한 악곡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때의 크로노미터는 아직 메트로놈이라고 불리지 않았으며, 기계적인 메트로놈과는 달랐다. 메트로놈의 실제 발명가는 네덜란드의 기사 빙켈이라고 한다. 멜첼은 1815년 암스테르담에서 빙켈의 제품을 알게 되었고 그 아이디어를 그대로 빌려 파리에서 그것을 모델로 한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1816년 파리에서 메트로놈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품의 특허를 취득하였다. 멜첼이 비엔나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817년이다.
노테봄의 <제1베토베니아나>에 의하면, 멜첼은 1815년이라는 연대를 메트로놈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메트로놈에 대한 소식이 비엔나에 전해진 것은 1816년 가을로 추정된다. 멜첼은 파리에 메트로놈 공장을 세워 대량생산을 하게 되고, 1817년 초에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널리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멜첼이 목표로 삼았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리 큰 판매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쉰들러는 그의 저서 "베토벤"에서 크로노미터와 메트로놈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질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812년 봄 베토벤, 기계 제조업자 멜첼, 브룬스비크 백작, 쉬테판 폰 브로이닝 등의 여러 사람이 송별 식사를 위해 모였다. 베토벤은 린츠에 있는 동생 요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교향곡 8번>을 작곡한 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로 가려 했다. 멜첼은 그 유명한 자동식 메트로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그 계획을 연기하였다.
이 기계 사업가가 발명한 박자 측정기 메트로놈은 이미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 효과를 인정하고 대중들에게 추천을 할 만큼 진보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기지를 발휘하여, 풍자하듯이 그 기계를 '지휘자가 필요없는 물건'이라고 말하며 카논을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하였다. 그것을 곧 친구들도 노래하였다."
쉰들러는 이 책에 그 카논 악보를 실었는데, 이 카논에서 <교향곡 8번>의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가 만들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카논은 킨스키 -- 할름 작품 목록 WoO162에 해당하며 <교향곡 8번>의 2악장을 해설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것이다. 이것은 <타타타 카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카논에 "타타타 사랑하는 멜첼 씨. 안녕히 가십시오. 시대의 마법사, 위대한 메트로놈..."이라는 가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저녁모임이 1812년 봄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810년 3월부터 1813년 2월까지 브룬스비크 백작은 비엔나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작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고 해도 당시 멜첼의 메트로놈이 유명해졌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1820년 베토벤의 회화장에 의하면, 쉰들러가 <교향곡 8번> 2악장 동기에 의한 카논의 오리지널 악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것을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베토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한 1824년에 {타타타 카논}을 노래했던 즐거운 저녁은 1817년 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멜첼은 1817년 말이 되어서야 비엔나에 돌아와 메트로놈을 선전하였다. 식사를 한 것이 1812년 봄이라면 당시 노래한 카논 가사는 현재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메트로놈이라는 이름도 아니었을 것이다. 1817년 말에 노래한 카논은 현재의 가사와 같은 카논으로 보이지만 이 연도도 쉰들러가 적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단, 쉰들러가 자신은 소프라노를 노래하고, 멜첼이 베이스를 노래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멜첼이 비엔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이 카논 악보에는 메트로놈 속도로 8분음표가 72라고 적혀 있다. 노테봄에 의하면, 이것은 쉰들러가 <교향곡 8번> 2악장을 보고 적은 것으로 보이며 베토벤 자신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노테봄은 이 카논이 1812년 여름에 즉흥적으로 작곡된 것이며 교향곡 8번 2악장의 스케치 연대와는 모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카논이 2악장에 이용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1812년 봄에 저녁모임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그때 베토벤이 이미 이 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쓰는 것을 중단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카논과 2악장의 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출처 : 클래식 카페 필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