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교향곡 제7번
1809년부터 1811년 사이 베토벤에게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저 전쟁이다.
1809년 5월 그가 교향곡 3번을 헌정하려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군대가 빈을 침공한 것이다. 이에 베토벤은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더불어 전쟁 통에 건강도 좋지 못하였다.
또한 그를 도와주던 후원자들이 모두 빈에서 도피하여 경제적인 후원도 끊기게 된다. 창작에 있어서도 공백이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무렵 1809년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1792~1851)라는 대지주의 딸을 사랑하게 되고 실제 구체적으로 결혼까지 고려하였으나 청혼을 거절당해 이 사랑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온 현악4중주 10번 Op.74의 <하프(Harp)>나 11번 Op.95 <세리오조(Serioso)>에서 나타나는 밝은 악상과 심각성의 대조는 이런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해 작곡된 유명한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이 테레제를 위한 곡이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베토벤의 불명의 연인 중 가장 유력한 후보와의 사랑이 이 시기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1811년 또 다른 불멸의 연인인 테레제 부룬스빅(Therese Brunsvik, 1775~1849)으로부터 그녀의 초상화를 받고 그녀와의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한편 평소 그가 존경하던 괴테를 1812년 여류 시인 브렌타노의 소개로 보헤미아의 온천지 테플리츠(Teplitz)에서 만났던 것도 이 무렵이었고, 당시는 베토벤의 귀가 더욱 들리지 않게 되어 메트로놈(Metronome)의 발명자 멜첼이 만들어 준 보청기도 소용이 없어 필기장을 쓰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렇게 베토벤에겐 전쟁과 실연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한차례 지나가고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것을 반영이나 하듯이 1813년 탄생한 곡이 교향곡 7번인 것이다. 이런 그래서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은
“이 곡에서는 다른 작품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솔직하고 자유로운 힘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초인적인 정력의 터무니없는 낭비, 그렇다. 낭비의 즐거움이다. 철철 넘쳐나는 대하의 즐거움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흔히들 베토벤 교향곡들을 말할 때 짝수 번호는 경쾌하고 우아하며 홀수 번호는 웅장하고 호탕한 것이라 하는데, 7번 교향곡은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또한 이 곡은 성격면에서 5번과 6번 교향곡의 경우처럼 8번 교향곡과 짝을 이룬다. 음악평론가 베커(Paul Bekker, 1882~1937, 독일)는 “7번은 높은 봉우리로의 등반을 나타내고 8번은 가까스로 정복한 정상에서의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란 말로 쌍둥이면서 그 성격이 전혀 다른 7번과 8번의 특징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곡상은 철저히 베토벤의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일변을 드러낸 것으로 운명을 박차고 나가는 인간의 강렬하고 의지에 넘치는 힘의 분출을 나타낸다. 특히 어느 교향곡보다도 생기에 넘치는 율동이 전편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약한
나르시시즘을 거부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것이다. 거기에는 즐거움과 분격(憤激)의 열광, 급작스러운 대비, 엄청나고 거창한 용솟음 그리고 거인적인 폭발이 있다. 괴테로 하여금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그래서 바그너는 이 곡을 ‘무도(舞蹈)의 성화(聖化)’로, 리스트는 ‘리듬(rhythm)의 신격화(apotheosis)’라는 말로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공개 초연은 1813년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상의 용사를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때 <전쟁 교향곡>으로 불렸던 <웰링턴의 승리> Op.91과 8번 교향곡도 같이 연주되었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으로 2악장이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제1악장은 역동적인 곡상으로 최고의 함축성을 지닌 리듬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된다. 2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to)는 교향곡 3번의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과 같은 풍으로 가슴 저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비감과 애수를 띤 엄숙한 주제가 일품이다. 마치 실연과 전쟁의 상처를 연상시키듯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내면적인 서정미와 정신적인 감동이 있다. 이런 것은 베토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며 흔히 ‘영원한 알레그레토’라고도 한다.
그리고 3, 4악장은 질주하는 듯한 강렬함이 아주 인상적인데, 특히 4악장이 말 그대로 격렬한 리듬의 향연을 구가한다. 이런 것에 베토벤 스스로도 “나는 인류를 우해 좋은 술을 빚는 술ㄹ의 신 바쿠스(bacchus, dionysos)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음악에 취하게 해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초연 당시 클라라 슈만(Alara Schumann, 1819~1896, 독일)의 아버지인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는 이 작품이 술에 취했을 때 작곡하였던 것이 아니가 하였다 한다. 또한 이런 것을 반영이나 하듯 전 4악장 중에서 선율을 노래하는 느린 악장이 없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교향곡은 전 서양 음악을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로 음악이 한낱 유희일 수 없다는 그의 이상과 지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위대한 작품이다. 나폴레옹이 대륙을 정복하려던 바로 그해 베토벤은 이 음악을 통해 예술적 위대함을 의연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