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과 교향곡 제3번
1802년 10월 베토벤은 빈 교외의 조용한 시골 휴양지인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서 그
유명한 유서를 쓰게 된다. 하지만 자살을 하지 않고 다시 빈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는 교향곡 3번<영웅(Eroica)>을 비롯하여 <열정(Apppassjionata)> 소나타, (레오노레(Leonore)> 서곡, 교향곡 5번 등 그의 생애에 가장 뛰어난 걸작들을 탄생시킨다.
알려진 대로 <영웅> 교향곡은 나폴레옹을 말하는 것인데, 베토벤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며 크게 이름을 떨치는 나폴레옹이야말로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이자 구원자인 세기의 영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헌정하고자 1803년 교향곡 작곡에 착수 다음 해인 1804년 곡을 완성하고 표지에 “Sinfonia grand intitolata Bonaparte (공란) Ludwig van Beethoven"라고 적는다.
하지만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1804년 5월 18일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의 제자 리스(Ferdinand Ries, 1784~1838)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다는 소식을 베토벤에게 처음 전해 준 것은 나였다. 베토벤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그도 역시 속물적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전 인류의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인가. 그도 자신 이외의 모든 인간 위에 올라서서 폭군이 되고 싶은 것이다”라고 소리치며 책상에 있던 악보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 이 때문에 1806년에 출판된 악보 표지는 새로이 <신포니아 에로이카(sinfonia Eroica)>로 붙여지게 되었다’
라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영웅교향곡이라 부르게 된다. ‘어느 영웅을 회상하기 위하여(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enier di un grand'uomo)’라는 글귀와 함께.
이것이 잘 알려진 유명한 일화인데, 리스의 말대로 베토벤이 표지를 찢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았으며 현재 그 표지는 빈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찢어 버린 것이 아니라 ‘Bonaparte(보나파르트)’란 글자를 베토벤이 심하게 지운 것이었다. 구멍이 뚫릴 정도로. 곡의 헌정은 로프코비츠(Franz Joseph von Lovkowitz, 1772~1816)후작에게 이루어진다.
곡의 초연은 1805년 4월 7일 빈의 안 데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당시 라이프치히의 음악신문은 “곡을 더 축소시켜 전체적으로 더욱 밝고 투명한 통일감을 갖게 해야 한다. ··· 일반인들이 친숙해지기 위해 많은 것이 부족하다”란 부정적 평을 실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영웅 교향곡은 착상과 처리에 있어 힘이 넘쳐흐르고 있고 그 양식에 있어서 숭고함을 지니고 있다. 또 형식에 있어 극히 시적이라는 점에서 이 작곡가의 드높은 영감으로 이룩된 다른 작품과 비견될 만하다. 이 작품을 듣노라면 나는 어떤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피상적인 것만을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하고 하였고,
1851년 바그너는 “강렬하고 완벽한 하나의 인격과 힘차게 자신을 관철시켜 가는 감정이 이 작품의 예술적 공간을 채우고 있다. 모든 고귀한 정념을 더 할 수 없이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완성시키고 있다. 그곳에는 감정의 유연성과 가정 정열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적인 모든 요소가 표현된다. 완성을 향한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이 작품의 영웅적인 발걸음인 것이다”라는 극찬을 남기고 있다.
이런 교향곡 3번은 낭만주의를 새롭게 개척한 선구적인 작품으로 이전의 작품들과는 체질적으로 다른 면을 간직하게 된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이후의 작품이면서 또한 자신의 속내를 이미지화하고 있다. 위기와의 투쟁, 과거와의 결별, 위기의 극복을 통한 인생의 비상을 그리고 있다. 이미 그의 마음에서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문을 지워졌고, 자신의 곧 영웅으로서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내면의 응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 자체도 그가 위대한 인간으로 성장함에 따라 음악적 사상을 종래의 고전적 형식 속에 담을 수 없었고 전체 연주 시간만도 50분에 이루는 대작으로 구성하며 음악적 수법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다.
1악장은 매우 규모가 크며, 2악장은 장송 행진곡(marcjia funebre)을, 3악장은 미뉴엣(miunet)이 아닌 스케르초(scherzo)를, 그리고 4악장은 자유로운 형식으로 변주곡 푸가(fuga)의 도입이 그것이다. 특히 교향곡으로 종악장에 변주곡을 도입한 것은 이것이 최초이다. 이런 것들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며 낭만주의적 정신을 예고하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한편 2악장 장송 행진곡에 대한 의미도 의문인데, 정말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요량이었다면 왜 장송 행진곡을 넣었을 까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영웅을 존경하여 헌정한다는 작품에서 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본다.
첫째, 당시 빈에서는 사회적 정서와 관련하여 장송 행진곡이 유행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같은 시기에 작곡된 그의 피아노 소나타 12번 Op.26 3악장에도 장송 행진곡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흔히 영웅에게 나타나는 비극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아무런 의미 없이 1악장과 대조를 이루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넷째, 정말로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을 생각했고 또 이런 영웅들이 겪는 덧없는 종말을 미리 경고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1821년 귀양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베토벤은 ‘나는 이미 17년 전 이런 것을 음악에서 예고한 바 있다’라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다섯째, 작곡 당시 베토벤이 유서를 쓰고 자살을 결심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인간 본질의 비극성 내지는 이런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한편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 오스트리아)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유명한 장군이 넬슨 제독이나 1801년 3월 이집트에서 전사한 영국의 아바크롬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마지막 4악장에는 발레 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Op.43의 끝곡과 <12개의 콩트르당스> WoO 14의 7번을 대위법적으로 결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1802년 작곡된 <15개의 변주곡과 푸가> Op.35에서도 이 두 주제를 사용하여 <에로이카 변주곡(Eroica Variations)>이라 하고 있다. 이렇게 베토벤이 다른 작품의 주제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일례적인 것이라 인간 해방의 프로메테우스와 나폴레옹을 연관시켜 진정한 영웅적인 것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리스 신화 얘기에 나오는 비극의 신 멜포메네(Melpomene)가 칼로 프로메테우스를 찔러 죽이는 것에서 장송 행진곡을 생각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곡은 특정한 영웅에 대한 묘사라고 하기보다는 보편적 인류의 영웅적 행위와 그 정신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웅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원초적인 주제를 통해서, 또한 베토벤 자신의 내면과 맞물려 있는 그 어떤 의미도 포함하여···.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 음악)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