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명창 안향련 소리전집 8앨범
현해탄 거친 물결에 스스로 몸을 던진 윤심덕이 절망적으로 증거해주듯, 금지된 사랑의 끝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겨우 서른일곱 남짓, 한겨울 깊은 밤 약봉지를 입에 털어넣어 세상을 버린 소리꾼 안향련(安香蓮. 1944-81)의 생애는 한 마디로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였다. 사랑과 예술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생을 마감한 방식은 윤심덕만큼 극적이지 않았지만 약물 과다복용에선 빌리 홀리데이를 연상시킨다. 안향련은 자기 세대 최고의 명창이었다. 한 눈에 재능을 알아본 김소희가 데려다 수제자로 삼을 만큼 그의 소리는 청아하면서도(천구성) 흐리고(탁성) 곰삭은 맛(수리성)까지 갖췄으며 표현력이 남달랐다. 이번에 신나라레코드에서 CD 8장에 담아 정리한 그의 전집이 이를 충분히 증명할 것이다. 게다가 미모였다. 그리고 육감적이었다. 보성에서 소리 공부하던 시절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 좀 보자고 몰려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동거했던 한 남성은 그를 가리켜 "살이 우는 여자"라면서 그와 사랑했던 남자라면 누구든 결코 그 살맛을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품성도 다감했다. 그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바 있는 유미리에 따르면, 안향련은 인정이 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비를 맞고 가면 몸을 씻겨줄 만큼 자상했다. 국창 임방울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에서 태어난 안향련은 11세 때부터 부친 안기선에게, 10대 후반부터는 정응민, 정권진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6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김소희와 인연을 맺으면서 활동 근거지이던 부산을 떠나 상경했다. 1970년부터 KBS MBC TBC 등의 국악 프로그램에서 판소리와 창극의 주인공 노릇을 도맡아하다가 1981년 12월 세상을 등졌다. 짧은 생에서 그는 많은 것을 남겼다. 특히 판소리의 서름조를 차원 높은 미학으로 발전시킨 공은 특기할 만하다. 깊은 설움에서 우러난 판소리의 비장미는 종래의 표현법으로는 성취할 수 없던 그 무엇이었다. 안향련은 처자식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이당 김은호의 수제자로 꼽히던 화가였다. 이루지 못할 사랑은 상처와 고통을 남기는 법. 그것을 죽음으로 매듭짓는 것은 삶의 신산(辛酸)을 넘어 아름다운 뒷날을 기약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었으리라. 그의 자살에 대해서는 '착실히 준비된 죽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심청가' 완창에 이어 '흥보가'도 완창을 해두었다. 물론 무대에서가 아니라 방송사에 가서 매일 생중계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끝물에 이르러 약을 먹었던 것이다. 안향련의 생애에 대해 '혼불'의 작가 최명희(崔明姬. 1947-98)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의 모델이 바로 안향련이다. 부친에게서 소리의 기초를 닦은 후 안향련은 보성의 정응민과 정권진에게 배움으로써 자신의 판소리 바탕을 찾기 시작한다. 정응민은 숱한 명창을 배출한 큰 소리꾼이었다. 안향련 소리에 결정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어준 인물은 장영찬(張泳瓚. 1930-81)이다. 안향련은 장영찬에게서 1963-65년 무렵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영찬의 소리는 성색이 분명하고 목구성이 다양해지면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안향련은 그런 그에게 배우면서 자신만의 예술창조를 위한 튼실한 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 안향련은 마지막으로 김소희의 제자가 된다. 때마침 서울로 진출한 남자 명창 조상현과 단짝이 되어 서울 무대를 누비고 다녔다. 김소희는 안향련에 대해 "아무 사설에나 곡만 붙이면 소리가 되는 사람"이라며 그의 천부적 재질을 칭찬했다. 그러나 안향련과 함께 또다른 애제자 김동애까지 병사하게 되자 스승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김소희는 두 제자를 위해 김대례(진도씻김굿 인간문화재) 굿패를 불러 굿을 했다. 좋은 곳으로 가서 소리의 신으로 다시 나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나 굿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김소희를 비롯한 명창들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김대례의 굿 노래를 따라 제의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음악학적으로 말하자면, 판소리와 씻김굿의 음악이 상호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요절한 예술가의 생애는 언제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은 대개 높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지만 삶 자체는 미완성이므로 '종합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안향련의 경우,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기 세대에서 그만한 기량을 과시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경기대 국문학과 김헌선(金憲宣) 교수는 안향련에 대해 "당시 여류 명창이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목구성(목청)이 좋고 세련됐으며 소리의 공력이 확연히 뛰어나 판소리의 전반적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안향련은 70년대 TV의 본격적 보급과 함께 시각적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한 초기 시청각 시대의 수혜자"라고 평가했다. 신나라 CD에는 '심청가' '흥부가' 등 판소리를 비롯해 오정숙 남해성과 함께 부른 토막소리들도 실려 있다. 글출처 : 정원기 국악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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