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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Dalaras

그리스의 고유한 정신 세계를 대표하는 지중해 최고의 남성 싱어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는 게오르기스 달라라스.

그리스 음악인들로서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인물은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음악을 작곡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 라든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를 이끌다가 전자음악가로 변신한 반젤리스(Vangelis)일 것이다.

또한 프랑스의 "샹송 가수"이자 "뜨루바도르(음유시인)"인 조르쥬 무스타키(Gerorges Moustaki)도 그리스 태생이며 그의 음악에 "지중해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도, 반젤리스도 "올림픽의 고향"인 아테네의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채우지는 못했다. 반면 1983년에 두 번에 걸쳐 스타디움에 80,000명의 청중을 모은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게오르기스 달라라스다.

"그리스 음악"하면 렘베티카(rembetika)를, "그리스 악기" 하면 부주키(Bouzouki)를 각각 떠올릴 것이다. 류트의 일종인 현악기 부주키는 지금도 많이 사용되지만 그리스의 현대적 대중음악의 이름은 라이코(laiko: "popular"라는 뜻이다)라고 불린다.
Bouzouki ▶

게오르기스 달라라스는 라이코의 제왕이자 지난 20년간 "동지중해 지역을 강타한 대중음악 중에서 가장 거대한 현상"이라는 칭호를 듣는다.

게오르기스 달라라스는 일찌감치 음악인의 길을 들어선 유형에 속한다.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아버지인 루카스 엔타랄라스(Loukas Ntaralas)가 유명한 렘베티코 음악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5살 되던 해인 1965년에 아버지의 음반에서 레코딩 데뷔를 한 그는 1968년 첫 솔로 앨범 [Expectations]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직업적 음악인의 경력을 밟았다. 그 결과는 약 30년 동안 50종에 가까운 음반의 발매와 700만장의 판매고로 나타났다.

이런 다산형 음악인의 음악을 몇 마디로 표현하기는 매우 힘들다. 어쨌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나 지아니스 마르코풀루스(Giannico Markopoulos)같은 현대 그리스 음악의 거인들의 음악, 디모티코(Dimotiko)나 니시오티코(Nissiotiko)같은 그리스의 민속음악, 렘베티카(rembetika)와 스미르네이코(smirneiko)라고 불리는 "아시아계 소수민족"이 가져온 음악들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했다.

물론 10대 시절 비틀스, 롤링 스톤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의 국제적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이 모든 것이 내게 영향을 미쳤고 한 아이에게 불가항력적인 감정을 야기했다. 그 아이는 그가 태생적으로 음악인이라고 느낀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나는 뒤에 이 모든 영향들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영향을 나의 음악적 방향으로 변형시키고자 했다" 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 결과 그의 음악은 유럽과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점이지대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반영하듯 "내셔널" 하면서도 "트랜스내셔널"한 것이 되었다.

서구의 악기인 기타(guitar)와 (동)남구 악기인 부주키가 함께 연주되면서 현대적으로 프로듀싱된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자로부터 끓어올리는 듯한 그의 신실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달라라스의 음악은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달라라스의 라이코는 렘베티코와 스미르네이코를 생동하는 음악으로 만들어 젊은 세대에게도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전세계의 대중음악 가운데 "전통의 현대화"에 성공한 음악형식을 꼽으라면 인도와 더불어 그리스가 모범 사례로 꼽힐 것이다.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94년 신축된 아테네 콘서트 홀에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그리스 음악의 역사를 추적하는 다섯 차례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이 공연은 무대에 오른 인물이 모두 225명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객석에서 박수를 친 인물 중에는 "정치 영화"로 저명한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Costa Gabras)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의 몇 차례에 걸친 공작도 그의 음악에 대한 신용을 더했는데,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오디세아스 엘리티스(Osysseas Elytis)의 시에 음악을 붙인 [Axin Esti](1988)는 국민음악의 거장의 작품에 신예 음악인이 참여한 명작으로 꼽힌다.

달라라스는 국민적 음악인일뿐만 아니라 국제적 혹은 범(凡)유럽적 음악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알 디 메올라(Al Di Meola)와 파코 델 루치아(Paco del Lucia)같은 플라멩꼬 기타 거장들과 함께 "라틴"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고, 앞서 언급한 고란 브레고비치와의 공작도 비슷한 맥락에 속한다. 1980년대 이후그리스 밖에서 250여회의 공연을 가진 것도 "국제적 음악인"이 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거기에 앰니스티 인터내셔널 등을 통해 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 사이프러스의 통일을 위한 노력, 여성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운동 등 "좋은 일" 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결과 1994년에는 케네디상(Kennedy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

Rembetika

렘베티카가 탄생한 것은 20세기 초라고 한다. 그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다양한 민속음악이 존재했고, 그리스 내륙의 민속음악은 디모티코(Dimotiko)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리스 내륙도 그렇거니와 수많은 섬들에도 고유의 민속음악이 존재했다.

이를 일별하기는 힘들지만 세 줄이 현악기인 리라(lyra), 우드(oud)와 유사한 라오우토(laouto), 클라리노(klarino) 등이 그리스의 악기들이다. 물론 부주키(bouzouki)와 바글라마스(baglamas)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네크가 길고 프렛이 달린 이 악기들은 20세기 이후 그리스를 대표하는 악기가 되었다. 비슷하게 생긴 사즈(saz)가 터키를 대표하는 악기인 것처럼...

'신이 선택한 나라' 그리스의 대중 음악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리적 특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해 양 대륙의 음악적 특성을 두루 받아들여 새롭게 창조해냈다. 서양의 멜로디와 음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아시아의 음악 특징들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랍 음악의 대표적인 선법인 '마캄 선법'은 물론이고, (한 음절에 다수의 음표가 붙은) 멜리스마 창법, 터키의 전통 악기인 사즈(Saz)에서 유래된 부주키 등이 그리스 음악의 아시아적인 특징들이다.

이런 동·서양의 문화의 충돌과 어울림이 용광로 안에 녹아들어 탄생한 그리스 최초의 대중음악이 바로 '렘베티카(Rembetika)'이다. 렘베티카의 탄생 배경에는 1923년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체결된 로잔 조약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스는 '대(大) 그리스'를 꿈꾸며 터키령의 소아시아를 점령했는데, 로잔 조약의 체결로 그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소아시아를 터키에 내주게 되었고, 그 곳에 살던 200만명의 그리스인과 그리스에 살던 80만명의 터키인들이 강제 교환된 것이다.


Rembetika and Greek Popular Music

갑작스레 살 곳을 잃어버린 난민들은 아테네의 뒷골목이나 항구 도시 피레우스 등지에 정착해서 고단한 삶을 꾸려갔다. 특히 피레우스는 항구 도시 특유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 때문에 많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난민들은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고, 뱃사람들과 창녀, 부랑자들이 모여있는 유흥가와 뒷골목에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룻밤의 쾌락과 삶의 고통이 공존하는 피레우스의 거리에서 바로 렘베티카가 태어났다. 그리스의 전통 음악과 터키에서 난민들이 가져온 음악, 뱃사람들이 전해준 주변 나라들의 음악 등이 섞이면서 '그리스의 블루스'는 울음을 세상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192,30년대 초기 렘베티카 음악은 부주키 또는 소형 부주키라 불리는 바글라마(Baglama)를 연주하며 외설적인 연애담이나 약물, 섹스 등 자극적인 내용을 테마로 노래를 불렀다. 이런 렘베티카의 초기 양식을 확립한 인물은 마르코스 밤바카리스(Markos Vambakaris). 피레우스의 뒷골목 건달 출신인 마르코스 밤바카리스는 독학으로 부주키 연주를 익힌 후 1930년까지 항구 도시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하류 인생들의 사운드트랙이었던 렘베티카는 1940년대 바실리스 찌짜니스(Vassilis Tsitsanis)에 의해 그리스의 '대중 음악'으로 승격되었다. '렘베티카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스 찌짜니스는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던 렘베티카를 밝고 화사하게 꾸며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탈바꿈시켰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가사의 주를 이뤘고, 서양의 하모니와 멜로디를 대폭 수용해서 부드럽고 친근하게 만들었다.


1960년대 접어들면서 렘베티카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와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라는 두 명의 위대한 아티스트에 의해 '예술'로 승화되었다. 정통 클래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그리스의 시적인 전통 음악과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접목시켜 매우 장엄하고 스케일이 큰 렘베티카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을 '예술적'이라는 뜻의 '엔테크노(Entekhno)'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1967년부터 1974년까지 계속된 군부독재정권 치하에서 노래로 투쟁하며 그리스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린 후 렘베티카는 새로운 물결에 동참했다. 전통보다는 '현대'를 택했다. 그리스적인 서정미와 선율들을 간직하면서도 전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팝'으로 변화한 것이다. 바로 '라이코(Laiko)'의 등장이었다. 게오르기스 달라라스(Georges Dalaras)는 그리스의 팝, 즉 라이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그는 기타와 부주키를 동시에 연주하고, 전통 선율을 현대적으로 프로듀싱하며 그리스 음악에 힘찬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렘베티카를 추억의 음악으로 생각했던 그리스 젊은이들에게도 라이코 음악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게오르기스 달라라스의 등장 이후에도 현재까지 하리스 알렉시우(Haris Alexoiu), 안나 비씨(Anna Vissi), 사키스 로우바스(Sakis Rouvas) 같은 인기 가수들을 계속 나오며 라이코 음악은 전성기를 계속 누리고 있다.

글 출처 : W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