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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Plastic Ono Band(1970)

John Lennon

  1970년, 마침내 비틀스라는 거대한 괴물로부터 탈출한 존 레넌은 반전과 인권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행동하는 뮤지션’으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비틀스 시절에는 표출할 수 없었던 자신만의 가치관을 거리낌 없이 피력하며 그는 반체제적 투사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새겨나갔다. 당시 닉슨 정부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비자 연기 신청이 기각되고, 이후 치열한 법정 투쟁이 전개되는 등 무엇 하나 순조롭지 않았던 고난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 존 레넌은 이런 불리한 처지에도 조금도 물러설 뜻이 없었다.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내가 여기 있든 또한 어디에 있든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할 것이다.”

   그의 이런 발언은 사실상 미국정부를 향해 전면전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로 일관해 1969년 11월, 영국군이 베트남 전쟁과 나이지리아 전쟁에 참전한 데 항의하는 뜻에서 비틀스 시절 받았던 대영제국 국가공로훈장(MBE – 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반환하기도 했다.

   투쟁을 위한 그의 도구는 언제나 그래왔듯 음악이었다. 「Working Class Hero」, 「Power To The People」, 「God」 같은 제목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당시 그의 사고는 서방 체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과격한 메시지를 표방하는 이데올로기 송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해 달콤한 팝을 기다려온 대중들에게는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다른 비틀스 멤버들이 속속 솔로 차트 1위곡을 발표하는 와중에도 그는 변변한 히트곡 하나 내놓지 못한 채 히트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존 레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단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멤버들(대표적으로는 폴 매카트니)이 해산 후에도 다분히 비틀스적인 음악을 추구하며 안전노선을 걸었던 반면, 존 레넌은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남다른 길을 걷는 뮤지션임을 웅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숀 레넌(Sean Lennon)은 이후 “폴의 첫 솔로 앨범은 꽤 좋았지만 거기에는 대담한 ‘퍽 유(fuck you)’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 음반은 미칠 정도로 빛나는 명반이다. 비틀스가 만든 것과는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너무나도 ‘존적’이다”라며 그 차이를 설명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오노 요코(小野洋子)를 향한 발라드 「Love」가 말해주듯 존 레넌이 제시한 해결책은 결국 ‘사랑’이었다. 그것도 단지 허울뿐인 사랑이 아닌 실재하는 사랑만이 ‘세계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실존의 날카로운 모서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인물’이라고 한 비평가 레스터 뱅스의 헌사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사암 이후, 이 음반의 진정한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팬들은 앨범 구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발표 당시의 푸대접에 비한다면 실로 엄청난 상업적 포상이었다. 이를 통해 존 레넌은 아티스트의 진실한 예술혼이 마침내 대중의 기호를 이겨내는,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록 역사에 아로새길 수 있었다.

글 : 배순탁
앨범 이름에서 우리는 오노 요코에 대한 존 레넌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존 레넌의 열성팬 중에는 오노 요코가 존 레넌을 망가뜨렸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 얘기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으로 오히려
존 레넌의 음악, 철학, 사상은 진일보했다.

동서고금의 많은 철학자들이 사랑에 대해 얘기를 했다지만 이 앨범 수록곡 
「Love」처럼 간결하게 설명하진 못했다.
글 : 배철수
글 출처 : Legend(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 배철수. 배순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