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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해금 : 김영재, 장고 : 박환영

총 연주시간 : 00:52:28


해금(嵇琴)

문헌에 따라 ‘혜금(嵇琴)’이라고도 되어 있으며, 민간에서는 속칭 ‘깡깡이’라고도 부름. 당나라 때 요하(遼河) 상류 북방 호적(胡狄) 중 해(奚)부족에 속하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래, 중국의 송·원대에 성행한 대표적인 찰현(擦絃)악기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유입되어 궁중의 당악과 향악연주에 사용되는 한편, 이후 민속악 연주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① 구조 및 제작법
구조는 공명통 위에 58㎝ 길이의 대나무[立竹]를 연결하여 명주실로 만든 2현을 걸고 이를 활대로 마찰하여 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 현재까지도 해금제작의 표본을 제공하는 『악학궤범』에 의하면 해금의 통과 주아(周兒)·원산(遠山)은 화리(華梨)·황상(黃桑)·대죽(大竹)·산유자(山柚子) 같은 단단한 나무를 사용하며, 공명통의 복판은 두충(杜冲)·오동나무 등을 쓴다. 그리고 입죽의 재료로 해묵고 마디가 많은 오반죽(烏斑竹)이 사용되는데, 입죽 속에는 주철(柱鐵)을 집어넣어 입죽과 통을 연결시키게 된다.

주아를 꽂는 구멍과 아래 끝은 모두 은(銀) 또는 두석(豆錫)을 씌우거나 은사(銀絲) 또는 두석 실로 감아매고 산성(散聲), 즉 허현(虛絃)은 가는 가죽 또는 채승(彩繩)으로, 주아의 아래 2촌(寸)쯤에서 두 줄을 동여매어 만든다. 활대는 출단화목(黜壇花木) 또는 오죽(烏竹)·해죽(海竹)을 사용하고, 활시위〔絃〕는 말총[馬尾]으로 만든 다음 시위에 송진을 칠해서 줄을 마찰한다. 지금은 두 줄을 괴는 원산으로 예전과는 달리 박(朴)을 깎아서 쓰고, 말총 위 끝을 가죽으로 붙들어 맨다는 것이 『악학궤범』과 다른 점이다.

② 조율법
현재의 조현법은 주아 아래로 두 줄을 붙들어 맨 끝으로부터 3, 4촌 아래에서 식지(食指)로 두 줄을 당겨 쥐고 조율한다. 이 때 중현(中絃)과 유현(遊絃)은 완전5도의 간격을 유지한다. 즉, 중현이 황(黃)이면 유현은 임종(林)이다.

③ 연주법
연주는 왼손으로 음정을 찾고 오른손에 쥔 활대로 줄을 마찰하여 소리를 내는데, 연주시의 음량은 두 줄을 괴는 원산을 이동시켜 음량을 조절한다. 즉 관현합주, 대풍류[音樂合奏]와 같이 큰 음량이 요구될 때에는 원산을 공명통 중앙에 세워 연주하며, 줄풍류·세악(細樂) 또는 가곡(歌曲) 반주와 같이 작은 음으로 연주할 때에는 원산을 공명통 가로 이동시켜 음량을 작게 한다.

④ 연주곡
고려시대에 유입된 이후 궁중음악의 향악과 당악에 두루 사용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연주법이 관악기처럼 지속음을 내기 때문에 현악기이면서도 반드시 관악에 편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해금은 독주 악기로서 큰 각광을 받지 못하다가, 20세기 이후 산조음악의 성행과 때를 같이하여 독주곡인 해금산조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해금산조(嵇琴散調)

해금산조는 현재 한범수(韓範洙)류와 지영희(池暎熙)류가 연주되고 있다. 한범수류는 1964년경 그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 및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 강사로 나가면서부터 한 바탕을 만들어 전한 것이다. 다른 악기의 산조와 비슷하게 한범수류 「해금산조」도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깊은 맛을 지닌 산조로 알려져 있다. 조운조(趙運朝)·강사준(姜思俊) 등이 그 가락을 이어받고 있으며, 연주 소요시간은 약 40분이다.

지용구(池龍九)의 시나위 더늠을 일부 전해 받은 지영희류는 경기도 도살풀이 풍(風)의 가락이 많은 산조로, 진양·중모리·중중모리·굿거리·자진모리로 짜여 있다. 진양은 우조·평조·계면조로 되어 있고, 중모리는 계면조·드렁조·계면조로, 중중모리는 살풀이조·비청·살풀이조로, 굿거리는 계면조·비청·평드렁조·계면조로, 자진모리는 계면조로 구성되어 있다.

지영희류에는 박상근(朴相根)류 「가야금산조」와 같이 굿거리장단이 쓰여지는 것이 특징이다. 지영희 해금시나위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된 바 있다. 연주 소요시간은 비교적 짧아 약 20분 정도이고, 김영재·최태현(崔泰鉉) 등이 가락을 이어받고 있다.

해금산조는 본래 지용구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지용구 자신은 경기도 도살풀이장단에 의한 곡이므로 산조라 칭하지 않고 해금 시나위라고 불렀다. 그의 가락을 제대로 이어받은 후계자는 없으나, 단지 지영희가 1935년경에 일부 시나위가락을 사사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글 출처 : 댜음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