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1. Brahms : Symphony No. 4 in e minor, Op. 98
작품의 배경 및 개요
1884년 51세 때 브람스는 작곡가로서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확보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신으로 가정도 없고 이즈음에는 친구들의 사별도 잦아지는 인생의 가을을 접하고 있을 때였다.
이해 여름 그는 빈 남서쪽의 뮈르츠실라흐(Murzzuschlag)란 곳에서 교향곡으로는 마지막이 될 4번의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뮈르츠실라흐는 브람스가 2년 계속해서 올 정도의 그의 마음에 들었던 곳으로 클라라(Clara Schumann)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놀랄 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마법과 같은 달밤의 하루를 당신과 보내고 싶어진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2개 악장은 연내에 쓰고 나머지 2개 악장은 다음 해 1885년 여름에 완성하게 된다. 20년이 넘는 1번에 비하면 다소 짧은 기간에 대작을 완성한 셈인데, 말하자면 마음에 드는 좋은 곳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정성과 공을 들인 작품인 것이다.
곡의 초연은 완성 다음 해인 1886년 10월 브람스 자신의 지휘로 마이닝겐(Meiningen) 궁정 관현악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연주는 대성공이었고 특히 3악장의 반응이 굉장하여 다시 연주될 정도였다. 그 후 뷜로와 브람스가 지휘하는 마이닝겐 관현악단을 비롯하여 열두 군데가 넘는 여러 도시에서 반복 연주되었다.
또한 빈에서는 리히터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의 연주로,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는 브람스가 지휘하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빈은 그의 교향곡 2번과 3번에는 열광하였지만 1번 교향곡에 대해선 지독히도 냉담한 반응을 보인 도시였고, 이와는 반대로 지적으로 진지한 도시인 라이프치히는 1번이나 2번이나 3번보다 더 좋은 평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결국 4번 교향곡을 통해 두 도시의 반응이 마침내 올바른 것으로 형성되었고 이런 사실에 브람스 자신도 매우 흡족해 하였다. 물론 공공연한 브람스의 반대파였던 바그너파를 제외하고 말이다.
브람스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어떤 이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어느 것이냐고? 그냐 제일 나중에 들었던 것이지.” 여기서 제일 나중에 들은 것이란 죽기 1개월 전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은 교향곡 4번이었다. 말하자면 작곡가 스스로도 가장 높게 평가했던 것이자 노경(老境)에 무르익은 내적 세계가 잘 표출된 마지막 걸작의 하나라 하겠다.
이런 4번 교향곡은 이전의 3개의 교향곡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형식뿐만 아니라 곡의 성격에서도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브람스 자신도 뷜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이 곡에서 이곳의 기후 같은 냄새가 나서 실은 매우 걱정을 하고 있다”라고 하여 곡의 텁텁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예전 교향곡에서는 볼 수 없는 애수에 젖은 어두운 고독, 우수가 처절히 드러나 있고 곡 전체에는 고립적인 은빛 간은 것이 빛나고 있다. 특히 늦가을의 허전한 적막감을 전해 주며 내성적인 체념의 울부짖음과 같이 인간의 영혼에 강렬히 소소하는 감명을 주고 있다.
한편 형식에서는 2악장에
교회선법의 일종인
프리기아(phrygian mode) 선법을 쓰고 있고 가장 특이한 것은 끝악장에는
파사칼리아(passacaglia)를 도입 과거로의 회귀 취향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런 파사칼리아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평소 가가 존경하던 바흐의 칸타타 150번<주여! 저는 우러러봅니다(Nach dir! Herr, Verlangent mich)>의 마지막 합창의 샤콘느(chaconne) 주제와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예전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따로 악보에다가 ‘파사칼리아’라든가 ‘샤콘느’라고 적고 있지는 않다. 이는 <하이든 주제의 의한 변주곡>의 마지막 곡의 경우와 같다. 또한 브람스와 뷜로와의 대화에서 이 바흐의 주제를 기초로 하여 교향곡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도 있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무자비할 정도로 진지하고 텁텁한 분위기와 낡고 고풍스런 관현악법 탓에 초연의 성공과는 별개로 처음에는 수수께끼 같은 곡이란 평을 들으며 단기간에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친구인 칼베크도 이 곡의 발표를 미루자고 할 정도였고 말러는 ‘텅텅 빈 음의 사닥다리’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하지만 뷜로는
“이 곡은 아주 빼어나다. 독창적이고 신선하며 마치 철과 은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 탄할 만한 에너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꿈틀거리고 있다.”라고 곡의 위대성을 미리부터 꿰뚫어 보기도 하였다.
1악장은 비통한 애수가 가득 찬 인생의 가을을 말해주고 있다.
2악장은 마치 상냥한 노래처럼 들리는데, 이것은 평생을 사모했던 클라라에 한 심경을 간곡히 토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치 베일을 덮은 조용한 아름다움이 비길 데 없다.
또한 3악장은 쓸쓸함을 벗어나려고 즐거워하면서도 항상 명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브람스 자신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4악장은 가을이 더욱 깊어진 만추(晩秋)인데 무언지 모를 감회와 잔잔한 슬픔의 그림자가 찬연히 빛나고 있다. 마치 늦가을 황량한 벌판을 걸어가는 작곡가 자신의 멜랑꼴리한 고독이 깊은 여울에 후물거리는 듯하다.
그래서 곡을 듣노라면 고풍스러우며 인간의 연속적인 과거로의 추억적 공감을 자아낸다. 특히 인생의 고독한 체험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이런 허전함은 브람스의 것이자 만인의 것으로 큰 위안을 주고 있어 브람스적인 체관은 마음에 스며드는 언어이기도 하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음악)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Allegro non troppo e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서주부 없이 길고 느릿한 제1테마가 현악기로 시작되는데 목관이 자유롭게 교대하면서 전개되어 나간다. 제2주제는 서사적이면서도 로맨틱하며 발전부는 부드러운 멜로디로 전개되면서 즐겁게 또는 극적인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된다.
제2악장 Andante moderato E장조 6/8박자 소나타 형식.
익살스런 성격을 띠고 있으며, 빠르면서도 즐거운 기분으로 연주하는 이 악장은 약동하는 힘과 긴장감이 감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Lento의 트리오에는 혼이 목가적인 선율을 연주하는데 일종의 숲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선율 구성이나 화음 구조를 쉔커식으로 분석하면 2악장의 주제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멜로디의 골격이나 화성구조는 피날레의 제2주제에도 같이 적용되어 일종의 순환양식처럼 느껴지게 된다.
후반부에 삽입된 하프의 매혹적인 글리산도는 마치 라벨이나 림스키코르사코프 같은 분위기를 전달한다.
제3악장 Allegro giocoso C장조 2/4박자 론도 형식.
팀파니와 저음현이 복잡한 리듬을 격렬하게 새기고 독주 바이올린이 매력적인 제1주제를 도입하여 기교적으로 전개한다. 그 다음 독주 바이올린이 이 악상을 이어받아 다시 기교적으로 변주 전개하고 관현악이 눈부시게 곡상을 끌어올려 제1의 주제부, 이어서 제2의 주제부가 각각 재현되어 전개된다. 독주 바이올린에 의해 장대하고 극적인 코다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급속한 음계가 연주되어 힘차게 끝난다.
제4악장 Allegro energico passionato e단조 3/4박자 파사칼리아 형식.
장엄하고 웅대한 느낌이 드는 일종의 변주곡으로서 고전 무곡의 형식이다. 처음에는 트롬본을 사용 했으며 거기에 목관과 혼이 첨가되는데 이같이 치밀한 대위법적 브라암스 음악가로서의 한 모습을 보여 준다.
2. Chávez : Sinfonia India (Symphony No.2)
Carlos Chavez(1899년 6. 13. ~ 1978. 8. 2.)
카를로스 차베스는 멕시코의 국민주의 작곡가 및 지휘자였다. 1899년 6월 13일에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카를로스 차베스는 멕시코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미 소멸되고 만 고대 인디오 음악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다.
〈심포니아 인디아〉와 〈심포니아 안티고나〉에는 인디오의 토속악기도 더해져 장엄하고 웅대한 고대 멕시코 문명이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음으로 재생된 감각이 있다. 1928년에 처음으로 멕시코에 교향악단을 창설하여 현재 멕시코시티에서 활동하고 있는 멕시코 국립교향악단의 기초를 만들었다.
글 출처 : 위키백과
3. Diamond : Symphony No.4.
David Diamond(1915. 7. 9 ~ 2005. 6. 13)
미국의 작곡가. 뉴욕의 Rochester에서 태어났다.
그는 Cleveland 음악학교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교육을 받았다. 1930년에도 계속해서 그는 Eastman 학교에서 작곡은 Bernard, 바이올린은 Effie Knauss과 공부했다. 1934년 가을부터 1936년 봄까지 뉴욕에 있는 뉴욕 음악학교와 Dalcroze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Paul Boepple과 Roger Sessions와 공부했다. 그 해 여름, Diamond는 “Tom 아저씨의 오두막집”에 기초해서 E.E Cummings가 각색한 발레 TOM의 음악작곡을 맡게되었다.
발레 안무가인 Leonide Massine은 파리 근처에 살았는데 Diamond는 안무가와 가까이 있기 위해서 파리로 갔다. 비록 재정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 작품이 공연되지는 않았지만, Diamond는 파리에서 Carius Milhaud, Albert Roussel, 그리고 그가 가장 존경했던 Maurice Ravel과 교제를 하였다. ( 발레 TOM의 첫 번째 오케스트라 곡은 1985년에 매우 늦었지만 굉장한 갈채를 받는 첫 공연을 하였다.) 1937년 파리에 두 번째 방문중이던 그는 퐁텐블로에서 Nadia Boulanger의 수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그가 막 작곡 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성가의 피아노 2중주를 관심 있게 들었던 Igor Stravinsky에게 소개되었다. Stravinsky의 평가에 기초해서 몇 번의 수정으로, 성가는 1937년 Publication Award를 수상하고, 1938년에는 그가 Guggenheim Fellowship(장학금)을 받는데 영향을 준 악곡들 사이에 있게 되었다. 1937년 Ravel의 죽음으로, Diamond는 금관악기, 타악기, 하프를 위한 비가(후에 현악기와 타악기를 위한 곡으로 편곡된)를 작곡하고 그 곡을 그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작곡가에게 바쳤다.
Diamond는 Guggenheim Fellowship을 받으며 파리에서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생활하였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자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의 문제들은 프랑스에서 타고난 젊은 작곡가의 운이 좋았던 생활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는 뉴욕에 있는 음료판매대에서 밤 근무자로 일했고, 바이올린 연습을 다시 시작한 후에, "Hit Parade" 라디오 오케스트라에서 2년 동안 일했다. 1940년대 많은 상들과 작곡위탁은 어느 정도는 Diamond의 매일 매일의 생활고를 덜어주었다.
1940년대에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1942), 현악4중주 No.2(1943), 교향곡 No.3(1945), 현악 4중주 No.3(1946, 뉴욕 음악 평론가들의 Circle Award를 수상), 피아노 소나타(1947),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샤콘(1948)을 포함한 중요한 곡들이 작곡되었다. 1950년대에 Diamond의 음악은 훨씬 더 반음계의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반음계주의의 좋은 예가 스위스 예술가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The World of Paul Klee이다. Irving Kolodin은 이 작품에 나타난 Diamond의 관현악 구상, 기법의 섬세함, 그리고 심상의 힘을 극찬했다.
1951년 쓰여진 현악 4중주 No.4는 Beaux Arts 4중주 단에 의해 Epic Records에서 녹음되면서 1965년에 Grammy 상 후보에 올랐다. Alfred Frankenstein은 그 작품을 현대 미국 실내음악의 대표작 중에 하나...라고 부르며 둔주곡 운동은 현대 미국 음악의 전체에서 발견되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중의 하나이지만, 전체적인 작품은 가장 뛰어난 작품성의 완성이다라고 말했다. 1951년 Diamond는 Fulbright Professor로 유럽으로 돌아갔다. Peermusic은 그와 1952년 독점계약을 맺었다. 그 계약으로 그는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1961년과 1963년 Buffalo 대학에서 Slee Professor로 임명받은 일과 같은 짧은 몇 번의 미국 방문을 제외하고는, 그는 1965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탈리아에 남아있었다. 그가 돌아갔을 때, Diamond는 그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전국 순회 콘서트로 환영받았다. 뉴욕 필하모닉은 그의 주요 오케스트라 작품들을 연주했다. 교향곡 No.5는 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고 피아노 협주곡은 Diamond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Harriet Johnson은 5번 교향곡에 대해서 그것의 상상력을 통해 빛을 발하는 풍부한 묘사는 즉흥적인 파동을 가지고 비상함과 동시에 형식의 논리와 구조의 경제의 정수라고 기록했다.
Leonard Bernstein은 더욱 열성적이었고 5번 교향곡이 “지금까지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응집된 교향곡”임을 알게 됐다. Bernstein은 Diamond의 음악의 “진지함, 지적임, 중후함, 재치, 기술적인 완성도, 그리고 풍부함을 칭찬하면서 그를 ”미국 음악 흐름의 중요한 지류”라고 불렀다. 1965년에서 1967년까지 Diamond는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 2년 동안 그는 몇몇 상의 수상자가 되었고, 그것들 중에 그의 현악 4중주 No.8에 주어진 Rheta Sosland 실내악 상, the Stravinsky ASCAP 상, 그리고 국립 문학 예술 학교에 선임된 것 등이 있다.
1971년에, Diamond는 그의 오페라 The Noblest Game을 쓰기 위해서 국립 오페라 학교 보조금을 받았다. Katie Louchheim가 쓴 가사로, The Noblest Game은 “최근 전쟁이 끝난 후에” 현실에서 벌어지는 워싱턴 DC의 권력집단에 일어나는 사회적인 음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David Diamond에 관한 초상도 그의 성악곡에 대한 언급 없이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노래들은 Jennie Tourel, Eileen Farrell, and Eleanor Steber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졌고 그의 가장 우수한 작품들 중에 끼어있다.
Hans Nathan은 “David Diamond는 그와 같은 수준의 어느 미국 작곡자보다도 더 견실하게 예술 가곡 발달에 노력해 왔다. 그의 가곡 하나하나는 보통 기악곡에 기울어진 것과 똑같은 세심한 주의로 구성되었다”라고 말했다. Diamond는 1973년 Juilliard School 작곡과 교수가 되었고 1990년대까지 강의를 했다. 1980년대에 시작된 Diamond의 음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작곡가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안을 수 있는 것이었다. 1986년, Diamond는 William Schuman Lifetime Achievement Award를 수상했다.
1991년에는 the Gold Med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와 the Edward MacDowell Gold Medal for Lifetime Achievement를 수상했다. 그리고, 1995년에, 백악관에서 열린 의식에서 예술 국민 훈장을 받았다. 이 시기가 지금까지 그의 가장 큰 교향곡들의 전성기였다. 교향곡 No. 11(1989-91)은 뉴욕 필하모닉이 150번째 창립일을 기념하기 위해 의탁한 몇 개의 작품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뉴욕 타임스의 비평란에서, Alex Ross는 “목소리의 자신감과 설득력은 확실하다.”라고 평했다. 이 말은 놀랄만한 60년이 넘게 쓰여진 그의 작품 대부분에 적용되는 것이다.
글 출처 : 다음카페 '필하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