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gar

Cello Concerto No.3 in e minor Op.85


Jacqueline du Pre (Cello)
Sir John Barbirolli (Conductor)
BBC Symphony Orchestra

1967/01/03 (ⓟ 2005) Stereo
Prague

Total : 00:29:50


INTRODUCTION

Elgar: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에드워드 엘가는 헨리 퍼셀과 조지 프리데릭 헨델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등장한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이다. 헨델의 경우엔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지만 독일 태생의 작곡가였고, 퍼셀은 300년 전인 17세기의 작곡가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품 <사랑의 인사>와 <수수께끼 변주곡>,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유명한 엘가는 무엇보다도 20세기에 작곡된 첼로 작품 중 가장 비극적인 곡 첼로 협주곡 e단조를 남긴 작곡가이다.

감정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비탄에 잠긴 첼로의 노래

일반적으로 협주곡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엘가는 교향곡과 같이 4개의 악장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이 작품은 1, 2악장과 3, 4악장을 서로 묶어서 휴식 없이 연주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곡에서 위로를 받는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슬픔의 입자들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은 매우 특별한 체험을 제공한다.

엘가의 이 위대한 첼로 협주곡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힘은 ‘마음의 위로’에 있다. 이 음악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슬픔의 바다에서 빛의 세계로 인도한다. 꿈보다 오래된 기억처럼, 가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퍼져 나오는 눈물 같은 조각들은 엘가의 한숨과 섞여서 흐른다. 첼로의 저음은 이토록 절절한 감정들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흔들린다. 엘가는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품의 간단한 구조 안에 있다.”고 말했는데, 삶에서 죽음 쪽으로 무너지는 인생에 대한 추억이 박혀 있는 듯한 느낌은 첼로 협주곡의 흐름을 타고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구성한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22일 영국의 햄스테드에서 엘가는 첼로 협주곡의 첫 번째 스케치를 쓰기 시작했다. 종종 대포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엘가는 부지런히 작곡을 계속했고, 마침내 7월에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작품을 완성해 나가던 사이사이 햄스테드의 야간특별경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엘가는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며 대작 완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해 여름의 대부분을 바이올린 소나타와 현악 4중주를 작곡하는 데 열중했고, 첼리스트 펠릭스 잘몬트와 첼로 협주곡에 대해 함께 의견을 교환한 이후 7월에는 촛대를 만드는 틈틈이 협주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손보았다.

엘가는 이 첼로 협주곡의 헌정을 오랜 친구였던 콜빈 부부에게 바쳤다. “당신과의 우정은 너무도 소중해서 우리들의 우정을 기념하고 싶습니다. 이 협주곡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던 작곡가는 몇 번이나 작품을 고쳤다. 8월 12일에는 일기장에 “나는 느린악장의 마지막을 생각해내지 못할까봐 두렵다. 따로 연주한다면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텐테.”라며 작품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1919년 10월 27일 마침내 첼리스트 잘몬트의 연주와 엘가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의 협연으로 영국의 퀸즈 홀에서 곡을 초연했다. 청중의 반응은 썰렁했다. 많은 사람들은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던져준 달콤함을 기대했던 것이다.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연습 부족도 문제였다. 악보의 출판도 2년 후에나 나왔는데, 첼로 협주곡을 출판한 출판사의 사장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엘가의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원하지 않아. 다만 합창곡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엘가의 부인은 이 협주곡이 초연된 후 5개월 뒤에 사망했고 엘가의 우울증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실 엘가로 하여금 작곡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어둠 속에서 끌어올려준 존재가 바로 그의 부인이었던 캐롤린 앨리스였다. 바이올린 소품 <사랑의 인사>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결과물이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Adagio - Moderato e minor 9/8박자
먼저 느린 서주로 시작되는데 몽롱하게 떠오르는 온화한 제1테마가 이 악장을 지배하는 주된 악상이다. 제2테마를 사이에두고 다시 주된 악상이 나타난다. 처음에 독주 첼로가 아다지오 e단조 4/4박자의 장중한 서창을 제시하며 보통 테마의 9박자로 바뀐다. 독주는 여러 갈래로 변해 가면서 테마를 반복한 후 조용히 쉰다.

12/8박자, 목관이 여리게 연주하는 모티프에 따라 첼로가 제2테마의 모티프를 연주하는데 명확한 형태가 아니라 변주하여 노래한다. 다시 9/8박자로 돌아가 제1ㅌ케마가 표정을 바꾸어 나타난 후 조용히 제2악장으로 넘어간다.

제2악장 Lento - Allegro molto G major. 4/4박자
스케르초풍의 명랑한 느낌의 경쾌한 곡이다. 독주 첼로는 자잘한 기교로 16분음표를 발전시킨다. 빠른 템포에 이르러 독주 첼로가 제1테마를 제시한 후 잛은 카덴차를 사이에 두고 모티프를 반복한다. 다시 제2테마가 나타나서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독주 첼로가 눈부시게 활약하는 경쾌한 스케르초라 하겠다.

제3악장 Adagio Bb major. 3/8박자
낭만적인 아름다운 가요악장이다.
A-B-C의 3개의 선율이 A-B-C-B'-C'-B"-A의 순서로 나타난다. 느린 발상으로 동경하는 듯한 선율이 아름답게 노래한다. 이것이 여러 갈래로 변화를 보이는데 선율의 테마은 시종 첼로로 리드된다. 그리고 반마침으로 다음 악장에 넘어간다.

제4악장 Allegro. e minor. 2/4
서주와 카덴차로 제1테마를 인도한다. 오케스트라가 활발하게 제1테마의 동기를 연주하면 모데라토 4/4박자로 바뀌는데 독주 첼로가 그것을 레치타티보풍으로 노래한다.

Allegro, ma non troppo 2/4박자.
제1테마가 기운차게 시작되는데 이는 첫머리의 레치타티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 곡 중에서 가장 명쾌한 힘이 된다. 제2테마는 G장조로 나타나 반복되며 몇 번이고 튀면서 다음으로 진행된다. 다시 환타지풍의 악상으로 진전되어 독주 첼로는 이를 화려하게 표현하는데 제2테마는 C장조로 나타난 변주된다.

얼마 후 poco piu lento 4/4박자로 변하여 감상적인 반음계를 포함한 경과적인 악절이 나타나며 점차 3악장의 낭만적인 구분으로 소생한다. 다시 3/4박자로 바뀌어 3악장의 정열적인 선율이 느리게 Ab장조로 회고적인 재현을 한다. 그것이 지속음으로 조용히 정지하면 제1악장의 첫머리에 나타난 아다지오의 서창이 제시되어 당당하게 연주한다.

Allegro molto의 율동적인 종결부에서 힘차게 끝난다.

글 출처 : 클래식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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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신들린 듯한 유명한 연주

많은 사람들에게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와 연결되어 있다.

1973년, 다발성경화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뒤프레의 비극적인 인생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에도 위기를 가져오며 숱한 일화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첫 번째 엘가 레코딩은 거의 뒤프레 자신과 동일시될 정도로 유명한 음반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엘가 첼로 협주곡의 첫 번째 선택 음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뒤프레가 존 바비롤리 경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1960년대 연주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제일 처음 들어야 하는 음반이다.

이 연주에는 뒤프레의 눈물과 한숨이 모두 녹아 들어가 있으며 오케스트라도 최상급 연주를 들려준다.

비극성의 확장과 거대한 스케일감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연주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한 음반보다도 바비롤리와 함께 협연한 첫 번째 녹음이야말로 뒤프레의 모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앞날을 예감하듯이 고통으로 가득 찬 울림으로 엘가의 슬픔을 인류의 슬픔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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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John Barbirolli(1899~1970, 영국)

바비롤리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 영국의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4세 때 바이올린(후에 첼로로 전환)을 배우기 시작했고, 10세 때 트리니티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1912~16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하면서, 관현악단 첼로 주자와 독주자로 활동했다.

20대 중반에 실내악에 몰두했고, 오페라로 관심을 돌려 전임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코벤트 가든과 새들러 웰스 극장의 시즌 공연과 영국 국립 오페라단 공연에 참여했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스코틀랜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고, 1936~37년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시즌 공연을 지휘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1941~42년 이 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눈부신 활동을 했다.

바비롤리는 이후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1943~68)를 이끌어 지휘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굳혔다. 1961~67년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1961~7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후 10여 년 간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갔지만, 계속해서 객원 지휘, 녹음, 세계적 관현악단과의 순회연주 등의 활동을 했다. 1949년 기사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