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Prokofiev
Piano Concerto No.2 In g minor, Op.16


Yuja Wang (Piano)

Simón Bolívar Symphony Orchestra
of Venezuela

Gustavo Dudamel (Conductor)


INTRODUCTION

1. Rachmaninov : Piano Concerto No.3 In d minor, Op.30

작품의 배경 및 개요

악마가 건내준 음악
피아니스트 황금기의 걸작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1873년 4월 1일 러시아 벨리키노보고로드에서 출생,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부조니,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악파 성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리아빈의 에튀드 5번을 고작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로는 2,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압도적인 비판을 받으며 그 충격으로 후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으니 뭔 설명이 필요한지?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노다메 칸타빌레에 등장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이 곡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우울증을 고치는 방법은 최면술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는데, 이 곡 1악장은 우울증을 치료한 것치곤 매우 격정적이며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악절이 상당히 많다.

뒤이어 1909년에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 극악의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많은 피아니스트 지망생들, 심지어는 프로 연주가들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곡.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도망갔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며,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레코딩이 존재한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이민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으며, 호로비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굉장히 유명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작곡보다도 연주회에 더 신경을 썼을 정도.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마르팡 증후군을 앓아 손가락이 길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

러시아 혁명 때문에 떠난 조국을 잊지 못해 소련이 독일에게 두들겨 맞을 때쯤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흑색종이 생겨 사망했다......고 원래 게시물에는 그렇게 써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연주여행 중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게 더 신빙성이 높은 듯, 당시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라흐마니노프가 일회성 방문이면 몰라도 귀국 권유까지 받아들였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보통 작곡가의 악보를 두고 서로 자기 해석이 짱이다 그러는 곳이 클래식인데[ 클래식 작곡가 본인이 남긴 레코딩이라면... 다 버로우지 뭐.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위에도 언급되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출처 : 엔하위키미러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텐토 D단조 4/4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주부에 뒤이어 d단조의 장엄한 테마가 피아노로 나타난다. 그리고 곧바로 제2테마가 피아노 독주로 다이내믹한 연주로 고조되어 나아간다. 곧 처음 분위기로 돌아가며 음악은 압축되듯 간결해진다. 빠른 부분에서는 변주곡으로 변주괴고 이것이 절정에 이르면 카덴차로 나타난다. 이어 제2주제가 나타나며 카덴차는 끝나고 처음 주제와 제2주제가 더불어 나타난다. 코다가 있은 후 웅대한 악장은 끝난다.

제2악장 인터메조-아다지오 A장조 4/4
2악장은 러시아의 동양적 특징을 나타내는 풍부한 음색이 나타나며 특히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여기에는 평화스런 잔잔함에 이어 주제가 왈츠의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극적인 카덴차와 코다에서 클라이막스에 이르는데, 끝 부분에 피날레의 제2주제가 광대하게 울린다.

간주곡(intermezzo)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오보의 독주로 이 간주곡의 주요한 멜로디가 연주되는데, 현악기는 이를 반복한다. 다시금 관악기에 새로운 테마가 계속하는데 이는 현악기의 왈츠조로 반주된다. 이렇게 전개하다가 피아노의 힘찬 화음과 화려한 음의 움직임의 연속으로 발랄하게 끝난다.

제3악장 알라 브레브 -렌토 d단조 2/2. 소나타 형식
오보에의 독주로 이 간주곡의 주요한 멜로디가 연주되며, 현악기는 이를 반복한다. 이어 관악기에 새로운 테마가 현악기와 더불어 반주된다. 제 2악장과는 대조적으로 먼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화음 연속의 연주에 뒤이어 피아노가 3잇단음표에 의해 시작한다. 제 2테마는 피아노가 연주하며 얼마 후 빠른 리듬이 가라앉게 된다. 피아노의 경과구는 다음에 예기되는 코다의 힘차고 빠른 템포를 준비하는 듯이 연주된다. 이같이 하여 웅장하고 화려하이 이 악장은 끝난다.
글 출처 : 클래식 명곡 대사전


2. Prokofiev: Piano Concerto No.2 In g minor, Op.16
작품의 배경 및 개요
러시아 혁명 후 파리에 머물며 모더니스트의 최첨단을 걷다가 1935년 다시 소련으로 영구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는 다른 러시아 출신 작곡가들과는 다른 커리어를 쌓았다. 왜냐하면 혁신적이고 전위적인 작곡가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다가 소련으로 돌아가 예술의 정치화에 순종했고, 쇼스타코비치 유의 자아 성찰의 내면성의 기간 없이 보수주의자로서 삶을 마쳤기 때문이다.

답할 수 없는 사실을 규명하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즉, 혁명이 없는 서방 국가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그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프로코피예프와 같이 천재성을 지닌 작곡가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는 어떻게 활동하고 발전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그의 음악적 성향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변화’를 겪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흔쾌히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의 방향을 선보이다

베토벤과 생상스를 제외하고 19세기의 작곡가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피아노 협주곡을 다섯 곡 이상을 작곡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 프로코피예프의 동료인 라흐마니노프와 메트네르만이 각각 네 곡과 세 곡의 협주곡을 작곡했을 뿐인데, 이들 작품은 세기의 피아노 협주곡 전통을 충실히 따르며 당시 음악계에 널리 퍼진 모더니티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로코피예프는 앞선 세 명의 작곡가에 비견할 만한 탁월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피아노 주법과 현대적인 오케스트라 어법을 결합한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의 방향을 선보였다.

당시 청중과 평론가들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현대성을 연상하며 그의 앙팡 테리블과 같은 모험을 즉각적으로 높이 칭송했다. 1918년 프로코피예프의 첫 피아노 협주곡이 1918년 뉴욕에서 초연된 이후 뉴욕 신문들은 프로코피예프를 “미래 세대를 위한 코사크인 쇼팽의 탄생”이라고 격찬했고, 시카고 신문들은 “러시아 혁명을 대표하는 음악으로서 놀라운 불협화음 위로 나부끼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붉은 깃발을 연상시킨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부터 1932년 사이 모두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첫 두 개의 협주곡은 학생 시절에, 나머지 세 개의 협주곡은 파리에서의 망명생활 시간에 작곡되었다. 한결같이 모더니스트로서의 프로코피예프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20세기 초반에 작곡된 중요한 레퍼토리로 손꼽히지만, 버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들에 대한 평론가들의 열렬한 찬사나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들에 대한 청중의 뜨거운 사랑 같은 것은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 가운데 3번 협주곡(1921년)은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널리 연주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1번 협주곡(1912년)과 2번 협주곡(1913년)은 그 음악적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까지 거의 그 중요성이 인식되지 않은 탓에 연주와 녹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Op.16은 피아노 협주곡 1번 Op.10이 작곡된 다음 해인 1913년에 작곡된 작품으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두 번째로 긴 연주시간을 요할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멜로디들의 향연이 네 개의 악장에 빼곡히 담겨 있는 대곡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내 음악은 효과에만 치중하며 아크로바틱적인 기교를 추구한다고 비판 받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 이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무한한 깊이를 부여할 수 있었다.”

작곡가는 지성미 넘치는 친구인 막시밀리안 슈미토프로부터 1909년부터 1912년 사이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서구 철학의 세계를 인도받았는데, 청년 프로코피예프는 누이에게 보낸 한 편지에 슈미토프에 대해 “그는 나의 절반”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1913년 5월 슈미토프로부터 자신이 아무런 미련 없이 권총으로 자살할 것임을 통보한 쪽지를 받았고, 슬픔에 빠진 프로코피예프는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 뒤 그에게 헌정했다.

1913년 8월 23일 파블로프스크에 이루어진 초연은 당시 러시아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청중은 작품의 생경함에 대한 반대의 뜻을 피력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고 러시아 음악협회를 비롯한 모든 소련의 음악단체는 일제히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미아스콥스키의 옹호로 1915년부터는 한결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이 곡을 통해 프로코피예프는 디아길레프로부터 발탁되어 발레 뤼스를 위한 작품을 위촉받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아파트에 일어난 화제로 이 협주곡의 초고가 소실된 탓에 1923년부터 작곡가가 재구성한 악보로 연주되고 있다. 1악장과 4악장에 확장된 규모의 카덴차가 붙은 것이 특징으로, 1악장의 카덴차는 전체 길이의 거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비중을 갖고 있다. 이 개정판은 1924년 5월 8일 파리에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지휘와 작곡가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제1악장: 안단티노 Andantino - 알레그레토 Allegreto
목관의 아이로니컬한 에피소드와 피아노의 레치타티보적인 멜로디(악보에도 내레이션이라고 지시되어 있다)로 시작하여,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언뜻 비슷한 느낌을 준다. 오케스트라 발전부가 등장한 뒤 제시되는 두 번째 주제는 리드미컬하고 대중적인 느낌이 강조되어 있는 만큼 청중의 귀를 잡아끌도록 고안한 작곡가의 배려가 돋보인다.

전통적인 방식의 발전부 대신 첫 번째 주제가 다시 소개되며 엄청난 길이와 심오한 내용을 담은 매머드급 피아노 카덴차가 시작한다. 이 엄청난 카덴차는 곧 발작에 가까운 영웅적인 격정을 일으키며 오케스트라와 함께 야성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룬 뒤 도입부의 서정적인 내레이션으로 회귀하며 끝을 맺는다.

제2악장: 스케르초. 비바체 Scherzo Vivace
2악장은 트리오가 없는 2분여의 짧은 악장으로 3악장과 1악장의 간주곡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3악장: 인터메조 Intermezzo. 알레그로 모데라토 Allegro Moderato
일반적으로 느린 악장에 해당하는 3악장은 두 개의 무궁동(moto perpetuo)적인 부분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대단히 빠르고 다른 하나는 단호하며 집요하다. 그리고 느린 부분은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의 에피소드를 재현한 것이다. 이 느린 악장은 전통적인 협주곡에서 보이는 느린 악장에서의 살롱적인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변화무쌍하고 전율적이며 난폭하기도 한 동시에 흥분으로 가득 찬,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감수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4악장: 피날레 Finale. 알레그로 템페스토소 Allegro Tempestoso
4악장은 오히려 전통적인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다운 발랄한 론도 혹은 화려한 무곡 풍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레그로 템페스토소의 지시가 말해주듯 폭풍우가 몰아치며 앞선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일종의 자장가로서 부유하는 듯한 피아노 멜로디로 이어진다. 라흐마니노프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서 이렇게 폭풍우와 자장가가 나선형을 그리듯 반복되며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점진적으로 증폭시켜 나아간다. 다시 한 번 장대한 카덴차가 등장하여 고통스러운 느낌과 비감 어린 제스처를 겹쳐 보이다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영웅적인 광폭함을 울부짖으며 끝을 맺는다.
글 출처 : 박연서원

유자 왕의 라흐마니노프는 당분간 그 상대를 찾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작부터 깊은 동굴에서 걸어나오는 거인의 움직임같은 울림과 함께 상상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연주가 계속됩니다.

같이 커플링된 프로코피에프도 압권.(프로코피에프가 어렵게 느껴지시면 나중에 들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