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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1967년 6월,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Montrey Pop Festival)에 모여든 군중들이 갑작스레 술렁이기 시작했다. 록 그룹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The Holding Company)와 함께 등장한 신인 여가수 때문이었다. 재니스 조플린이라는 이름의 이 무명 가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이로운 가창력으로 단번에 무대를 휘어잡으며 축제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떠올랐다. ‘못난이 처녀’ 재니스 조플린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이트 블루스(White Blues, 백인들이 하는 블루스) 싱어’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제니스 조플린의 블루스는 당시 여타의 화이트 블루스 그룹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마치 무당의 굿판을 연상케 하는, 내면의 고통을 토해내는 듯한 파워 블루스가 그녀의 장기였다. 특히 못생긴 외모 때문에 대학 시절 남자라고까지 놀림을 받았던 그녀에게 블루스는 응축된 감정의 기폭제이자 상처받은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녀는 「Buried Alive In The Blues」라는 수록곡의 제목처럼 블루스에 살고 죽으려는 듯한 폭발적인 가창으로 자신의 아픔을 폭포수처럼 발산했다. 도저히 사람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절창이었다. 인간 블루스 확성기가 따로 없다는 격찬이 뒤를 이었다.

   일례로 여성지 「Vogue」는 “제니스 조플린,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지금까지 노래 부르기의 역사는 사기임이 드러났다”라고까지 격찬할 정도였다. 수록곡 중 「Move Over」, 「Cry Baby」가 그에 대한 징표로써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외에도 「Mercedes Benz, 「Half Moon」, 바비 위맥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Trust Me」 등에서도 쉰 듯하면서 거칠고, 때로는 음란하게까지 들리는 그녀의 농밀한 목소리가 빛을 발했다.

   재니스 조플린은 고뇌에 찬 블루스로 거리 투쟁에 나선 당신 젊은이들의 안타깝고 괴로운 심정을 대변했다. 미국 역사상 대학생들의 시위가 가장 많았던 그 시절, 애끓는 블루스야말로 젊은이들의 심정 그 자체였다. 지미 핸드릭스가 기타로 청춘들의 투쟁성을 반영했다면 재니스 조플린은 목소리로 그것을 대신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음반은 실상 재니스 조플린의 그룹 활동 시절의 라이브에 비한다면 상당히 톤 다운된 스타일이다. ‘파워 블루스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노래를 불러보라’라는 앨범의 프로듀서 폴 로스차일드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재니스 조플린도 음반을 깨나 마음에 들어 해 발매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니스 조플린은 1970년 10월 4일, 스물일곱의 한창나이에 마약 과용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재능있는 블루스 싱어가 ‘무절제한 향락주의자’라는 오명을 남기며 허무하게 스러져간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이 앨범은 사후에 곧바로 발표되었고, 당시 연인 관계였던 뮤지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Kris Kristofferson)이 써준 「Me And Bobby McGee」가 음반과 함께 보란 듯이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아티스트의 죽음이 상업적 성공과 직결된다는, 음반 시장의 반암묵적 논리가 또다시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글 : 배순탁
음악계에 요절한 뮤지션들은 많지만 이 가수의 죽음을 정말 아쉽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노래하는 가수는 없었다. 
불꽃처럼 타올라 자신까지도 태워버린
그야말로 남김없이 타버렸다. 
이 앨범을 듣다보면 노래를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글 : 배철수
글 출처 : Legend(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 배철수. 배순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