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명연주 이야기

1920년.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은 17세 소년 루돌프 제르킨의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29세의 아돌프 부쉬는 그를 바로 자기의 반주자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연주회를 열었다. 또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이때 제르킨은 당시 세 살이었던 부쉬의 외동딸인 이레느를 만나게 된다. 이레느는 늘 장난처럼 “내가 크면 오빠와 결혼 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아버지의 실내악단에서 활동하던 이레느가 18세 되던 해인 1935년 이 둘은 정말로 결혼을 하게 되어 오빠 동생으로 15년간 지속된 인연이 부부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이….

이런 사위와 장인의 관계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콤비로 이어져 1952년 부쉬가 죽기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제르킨은 부쉬 현악 4중주단(Busch Quartet)과의 연주뿐 아니라 헤르만 부쉬(Hermann Busch, 1897~1975)와 더불어 3중주단으로 활약하며 주옥같은 연주들을 남기게 된다. 또한 부쉬 실내악단의 독주자로 브라덴부르크 협주곡 연주를 통해 베를린에 데뷔할 당시 앙코르곡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s)> 전곡을 연주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이렇게 하여 전설과 같은 위대한 가족 음악가의 자취를 남기게 된다.

이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 2번의 연주는 제르킨이 결혼할 시기인 1935년 녹음으로, 1번이 아니 2번을 선택했음은 이 곡의 아름다운 분위기가 제르킨과 이레느가 보여준 15년간의 사랑 이야기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음이다. 참고로 훗날 이들은 미국에서 1951년 말보로에서 같은 곡의 연주 녹음(SONY)을 남기고 있으나, 구 녹음에서와 같은 애절함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배경하에 탄생한 부쉬 형제인 아돌프와 헤르만 그리고 아돌프 사위인 제르킨이 들려주는 연주는 SP 복각의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곡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위대한 연주로 군림한다.

첫 악장부터 압도하는 세 주자의 뛰어난 기량이 곡을 거침없이 진행한다. 뚜렷한 각 악기가 토해내는 거장풍의 울림은 듣는 이를 음악 속에 바로 몰입게 한다. 더욱이 일치된 앙상블을 통한 풍성한 스케일은 가족애를 넘어선 뛰어난 음악적 일체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연주의 백미는 2악장 안단테(Andante con moto)의 연주이다. 악장 자체가 절묘한 감흥과 아름다움이 구가 되는 것인데, 이런 악상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구슬픈 눈물을 머금은 첼로가 잔잔하게 다가오며, 뒤따르듯 이따금 앞으로 나오는 피아노 역시 이에 걸맞은 미묘한 감정을 연출한다.

깊은 우수와 동경 어린 애틋한 감흥은 아련한 감동을 전한다. 더욱이 다시 반복되는 주제의 서정과 격정은 짧은 생을 살다 간 슈베르트의 처절한 삶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한숨과 격노가 교차하는 눈물의 울부짖음은 깊은 분노와 갈망이라는 생의 양면성을 생각게 한다. 또한 부쉬 형제들로서는 녹음 6년 전 28세로 요절한 피아니스트인 막내 하인리히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이렇듯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적 뉘앙스의 고고한 향기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이런 연주를 다시 접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부쉬 형제와 제르킨이 이루어 낸 명연의 위엄이 너무도 크고 위대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율적이라 할 만큼 가슴을 휘어잡는 연주이다.

참고로 부쉬 3중주단을 능가하며 동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3중주단인 카잘스 3중주단(코르토, 티보, 카잘스)은 3중주 1번인 Bb장조 D 898만 무려 48회 연주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고 녹음도 남기고 있으나, 이상하게 이보다 더 유명한 3중주 2번을 연주하고 있지 않다. 물론 단 한 차례의 녹음이나 연주회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카잘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프랑스 연주자들의 우아한 음색이 2번 Op. 100과 잘 부합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후일 카잘스는 피아니스트 호르죠브스키(Mieczyslaw Horszowski, 1892~1993, 러시아)와 바이올리니스트 슈나이더(Alexander Schneider, 1908~1993, 러시아)와의 연주(1952년)를 남겨 놓고 있다.

결국 극단적이고 서정적인 곡상인 2번 Eb장조 연주는 부쉬 3중주단의 몫으로 남았다 할 만큼 위대한 연주였다. 다만 음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오히려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을 대하는 듯한 추억에 사로잡히게 하는 매력도 있다.

앞서 말한 제르킨의 동화와 같은 숨겨진 사랑의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하여 연주가 더욱 애틋하게 늘리는 것은 아닐까?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