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s

Piano Concerto No.2 in Bb Major Op.83

Sviatoslav Richter (Piano)
Erich Leinsdorf (Conductor)
Chicago Symphony Orchestra

1960/10/17 Stereo
Chicago

술과 커피의 나날, 그리고 두 번째 협주곡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Bb장조

  · 1878년 작곡을 시작해 1881년 완성.
  · 피아노와 관현악의 대등한 어울림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 연주시간 약 50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iatoslav Richter)를 아시지요?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대개 들어봤을 겁니다. 러시아식 발음으로 하자면 ‘리히째르’가 맞겠지요. 한국에서는 리히터, 혹은 리히테르로 표기합니다.

그는 서른 살이었던 1943년에 소비에트 콩쿠를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전후 소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떠오릅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굉장히 늦은 데뷔였지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아주 정상적인 데뷔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서른 살은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요. 피아노라는 악기의 몸체가 유난히 큰 데다가, 음악적으로도 매우 ‘종합적’인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음악 전체를 조감하는 능력, 아울러 연륜이 묻어나는 해석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일반적인 논리로 확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도 상당한 수준의 연주를 들려주는 피아니스트들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재능’과 ‘노력’에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더욱 연륜이 쌓인다면 한층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점은 자명합니다.

어쨌든 서른 살에 데뷔한 리히테르는 1950년대까지 옛 소련과 동구권에서 활약하다가 1960년에 드디어 미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 Leinsdorf)가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했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것이 이른바 서방에서 녹음한 첫 앨범이었지요.

그는 녹음을 마친 직후 뉴욕 카네기홀에서 모두 다섯 차례의 연주회를 펼칩니다. 리히테르는 그렇게 서방에 진출합니다. 그래서 1960년에 라인스도르프와 녹음했던 음반의 표지 사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흔다섯 살의 리히테르가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번 글의 본론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이번에는 2번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알려져 있듯이 브람스는 1번을 작곡하고 20년이 넘어서야 2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브람스는 1번을 완성한 직후에 2번을 쓸 의사를 이미 표명했었지요. 하지만 1번이 라이프치히 연주회에서 엄청난 혹평(물론 거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돼 있었습니다)을 받자 곧바로 작곡에 착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두 번째 협주곡은 더 좋은 곡을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라이프치히에서 겪었던 모욕은 자존심이 강한 브람스의 마음에 상처를 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한참 뒤에야 작곡한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두 번째 협주곡은 다른 울림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은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 번 B플랫장조》를 쓸 무렵, 브람스는 음악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878년부터 작곡을 시작해 1881년에 마무리했으니, 말하자면 브람스가 쉰 살을 눈앞에 두고 완성한 곡이지요. 이때쯤이면 생활도 많이 안정되고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명성도 상당히 얻었을 때였습니다. 《독일 레퀴엠》 같은 걸작을 비롯해 교향곡 1번과 2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이미 완성해 초연한 뒤였지요.

그리고 브람스는 이 무렵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브람스의 덥수룩한 모습은 이때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아주 말쑥하고, 단정했지요. 꽃미남 청년이었던 브람스는 수염이 북슬북슬한 중년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서 체중도 많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술과 담배, 커피를 무척이나 즐겼다고 하지요. 그래서 점점 더, 배가 불뚝 나온 털북숭이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브람스의 전형적인 외모입니다.

결국, 두 번째의 피아노 협주곡은 중년의 브람스가 20년의 장고 끝에 날린 회심의 강펀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풍노도처럼 격정적인 곡은 아닙니다. 오히려 청년기에 작곡했던 1번이 더 격렬하지요. 쉰 살을 바라보는 브람스는 매우 신중해져 있었고, 그의 관현악법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1번에 비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은 완성한 직후에 엘리자베스 폰 헤르초겐베르크에게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는 편지를 보내지요. 참, 이 여성은 누굴까요? 그녀는 브람스의 피아노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빼어난 외모의 그녀에게 마음이 끌릴까 봐 두려워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일까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마음에 품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실제로 브람스는 여러 여성과 교제를 했지요. 하지만 결혼 직전에 번번이 관계를 단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것이 꼭 클라라 때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브람스라는 남자의 기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르초겐베르크는 브람스와 ‘우정’을 나눈 여자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가 《피아노 협주곡 2번》의 특징을 “사랑스럽고 연약한”, “정말 작은” 등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대체로 ‘브람스적 역설’이라고 해석합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과는 달리, 이 협주곡이 중후장대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지요. 1번보다 곡의 길이도 긴 데다 당시의 협주곡으로는 보기 드물게 4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도의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어서 피아니스트들에게 이래저래 부담이 되는 곡입니다. 하지만 피아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는 1번과 달리, 중년의 브람스는 이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등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을 듣다 보면 브람스가 여자 친구에게 완전 거짓부렁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1악장의 문을 여는 호른 솔로는 부드럽기 그지없습니다. 따뜻하고 목가적인 주제를 호른이 제시하고 피아노가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이에 반해 관현악 총주는 매우 남성적이고 당당한 분위기를 드러내지요.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연주되는 명확하고 리드미컬한 두 번째 주제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악장은 브람스 자신이 스케르초 악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피아노가 아주 단호한 서주를 힘차게 연주하면 시작합니다. 이어서 현악기들이 펼쳐내는 우아한 선율,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가 서주에서 보여줬던 열정적인 타건(피아노의 연주기법. ‘터치’와는 다르게 피아노 건반을 세게 두르림)을 다시금 터뜨립니다. 그 반복과 대비에 귀를 기울이면서 2악장을 들으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그야말로 열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고 무겁고 화끈하게 2악장을 마무리한 직후, 3악장의 입구에서 꿈결처럼 아름다운 첼로의 서주가 펼쳐지지요. 현악기군의 물결이 한 차례 흘러가고 피아노가 잔잔하게, 아주 여리게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잠시 음악이 급박하게 상승하는 분위기를 보여주다가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템포가 확연히 느려집니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잔잔한 선율에 클라리넷이 아득한 느낌으로 얹히지요. 이어서 현악기들이 클라리넷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첼로가 등장하면서 피아노와 어울립니다. 마치 맑은 밤하늘의 달빛처럼, 그윽하고 고즈넉한 느낌으로 충만한 악장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지막 4악장은 활달합니다. 생기 넘치는 리듬이 시종일관 펼쳐집니다. 특히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집시풍의 선율이 인상적이지요. 아마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특히 그중에서도 1번을 연상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현악기들은 집시풍의 물결을 그려내고, 피아노는 주로 발랄하고 경쾌한 표정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한 느낌으로 연주됩니다..


구분선

추천음반

1.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 1960년 | RCA

위 본문에서 언급했던 앨범이다. 서방에 첫발을 내디딘 리히테르는 매우 공격적인 연주를 펼친다. 특히 2악장에서 그렇다. 저음을 깊숙이 짚으면서 돌진하는 리히테르의 모습은 말년의 그가 보여줬던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연주와는 많이 다르다. 특히 4악장에서 보여주는 피아니스틱한 기교는 현란하다.
물론, 자신에게조차 까다로웠던 리히테르는 이 녹음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거론할 때, 이 음반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2. 레온 플라이셔, 조지 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 1962년 | Sony

플라이셔가 30대 초반에 선보였던 연주다. 플라이셔와 셀은 브람스의 작곡 의도에 충실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전투를 지양하고, 양자의 맛깔스러운 대화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우아하면서도 구조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 연주다. 이 격조 있는 연주가 한국에서 의외로 인기를 끌지 못해 아쉽다. 현재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녹음은 지난해 CD 5장의 전집으로 나온 음반이다. 오리지널 음반이 아닌 탓에 아쉬움이 크지만, 베초벤 '협주곡 전곡(5곡)'과 브람스의 '협주곡 전곡(2곡)'을 2만 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3. 에밀 길렐스, 오이겐 요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1972년 | DG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소개하면서도 1순위로 권했던 음반이다. 2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곡이 같은 음반에 커플링돼 있다. 강렬한 타건과 섬세한 서정이 마치 한 편의 마술처럼 완벽하게 펼쳐진다. 1번과 마찬가지로 연주의 템포는 다소 느리다. 1번에서도 그렇지만, 2번에서도 요훔의 지휘가 너무 점잖다는 비평이 간혹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요흠에 대한 선입견일 가능성이 크다. 요훔은자연스럽게 살짝 물러날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음악 전체를 조율한다. 이 녹음은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