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처럼 많은 곡을 남겼다면 곡을 발표할 때마다 수익이 생기고 당연히 풍족하게 지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그가 늘 돈에 쫓기듯 살아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흐는 후대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곡들을 많이 남겼지만,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리 인기 많은 작곡가가 아니었어요.
바흐는 교회를 위해 수백 곡이 넘는 칸타타를 작곡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거의 매주 한 곡씩 썼다고 해요. 이렇게 충성심 높은 작곡가라면 교회의 애정을 받을 법도 한데, 바흐는 꽤 오랜 시간 구박을 받습니다. 당시 시대를 한번 돌아보죠. 바로크 시대에는 궁정보다 교회가 더 큰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입니다. 교회는 수많은 신자를 신앙심으로 이끌어야 했는데 이를 지탱해 주는 것이 바로 종교 미사(예배)였죠. 미사를 지낼 때 꼭 필요한 것이 음악이고요.
깊은 신앙심으로 신을 섬기기 위해서는 어떤 분위기의 음악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묵직하고 웅장한 곡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바흐의 대표곡을 들어보면 엄숙함보다는 선율이 선율을 타고 오르는 다채롭고 화려한 분위기가 돋보입니다. 기존 미사 음악이 근엄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남성 4중창이었다면, 초창기 바흐는 오르간 솔로를 길게 넣고 선율을 쪼개면서 화려한 음악을 만들어요. 신자들은 당연히 기존의 엄숙한 미사 음악보다 새로운 음악에 더 관심을 가졌겠죠? 창작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도는 업적으로 남을 수 있지만, 교회의 입장에서는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존의 틀을 깨고, 사람을 매혹하는 음악을 만드는 바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된 거죠.
바흐가 오르가니스트로 처음 취직한 아른슈타트의 성 보나파카우스 교회도 이런 바흐의 음악을 안 좋게 보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이 때문에 바흐는 다른 연주자들과도 사이가 나빠져요. 심지어 바순 연주자와는 칼부림을 해서 법원에 끌려가는 등 여러 사건·사고를 겪게 됩니다. 마음이 크게 상한 바흐는 사직서를 내고 교회를 나와 버려요. 이후 뮐하우젠이라는 도시로 옮겨가 그곳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때 바흐의 초기 칸타타들이 탄생합니다. 뮐하우젠 시기의 바흐는 제법 안정을 찾고 곡을 쓰는 듯했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해요. 교회 내에서 음악과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통주의와 신앙에 집중해야 한다는 경건주의의 라마단 금식이 시작되는데, 바흐가 여기에 제대로 휘말려서 새우등이 터졌거든요. 세력 다툼에 휘말린 바흐는 온전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게 돼요.
이때 바이마르 왕실이 세 배의 연봉을 제안하며 궁정 작곡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마음고생 중이던 바흐의 입장에서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겠죠?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매우 활발한 작곡 활동을 합니다. 그의 오르간곡 대부분이 이때 작곡돼요. 여기서도 궁정 암투에 휘말리며 쉽지 않은 일상을 보내지만… 뭐, 어쩌겠어요. 예나 지금이나 남이 돈 받기가 쉽지 않은 건 똑같나 봅니다.
추천곡 III : 미뉴에트 G장조 - BWV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