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발디의 인생으로 돌아가 보죠. 보통 ‘성직자로 살았다’라고 하면 마냥 온화하고 선하며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비발디의 마지막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안나 지로라는 여성과의 비밀스러운 만남 때문이에요. 보통 사람이었다면 ‘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비발디의 직업이 ‘성직자’였기 때문에 여성과 사랑에 빠지거나 염문설이 나서는 안 됐습니다. 심지어 안나는 비발디가 음악을 직접 가르쳤던 제자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게 또 조금 애매한 것이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연인 관계를 인정했다기보다는 주변 사람 모두 ‘쟤네 사귀는구먼?’ 하는데 당사자들만 아니라고 발뺌했던 상황이었던 거예요. 비발디가 내내 아니라고 부인했음에도 소문은 일파만파 커집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추문으로 신도들은 비발디를 심하게 비난했고, 신부에서 파면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돼요. 다행히 파면이라는 불명예는 피했지만 안나 지로와의 소문으로 신도들의 신뢰를 잃은 비발디는 어쩔 수 없이 베네치아를 떠나게 됩니다.
빈으로 도망치듯 이주한 그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쓸쓸한 말년을 보냅니다.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왕궁 음악가로 활동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본인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수입은 점점 없어지는데 날이 갈수록 사치가 심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결국 빈곤에 시달리다 63세의 나이로 사망해요. 충격적인 사실은 장례 치를 돈조차 없어서 나라에서 제공하는 극빈자 장례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비극적인 결말이죠. 우리는 몇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조국에서 쫓기듯 도망쳐 나와 극빈층으로 죽음을 맞이하다니…. 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뭔가 허무하고 울적해집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서일까요? 아니면 나라와 문화의 문제였을까요? ‘작곡가인 나’와 ‘성직자인 나’를 동시에 부정당하며 홀로 끝을 맞이해야 했던 비발디. 그는 어떤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까요?
철학가 니체가 한 말 중에 “개인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할 권리는 오로지 그 삶을 살았던 개인에게만 귀속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 또한 비발디의 인생에 대해 무어라 평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만 먼저 세상을 떠난 비발디가, 자신이 그려낸 「봄」을 들으며 반가운 이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한 번쯤 내려다보았으면 좋겠어요. 살아내는 것만큼 벅찬 일이 바로 세상에 ‘나의 일부’를 남기고 가는 것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영화 <샤인>에 삽입되었던 비발디의 모테트(성악곡의 한 형식)이자 비발디의 마지막 삶을 연상시키는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라는 곡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