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곡가를 소개할 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클래식 작곡가는 모두 피아노를 잘 칠까요? 예나 지금이나 작곡가들이 음악을 처음 배울 때, 화성학이나 작곡 공부보다 피아노를 먼자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후 다양한 이론들을 접하면서 ‘작곡 능력치’가 올라가곤 하죠.

지금이야 컴퓨터 프로그램이 워낙 발달해서 작곡을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지만, 그 시절에는 음표를 그리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가 피아노밖에 없었어요.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피아노 앞에서 곡을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렇겠지만, 자주 만지고 오랜 시간 공을 들이면 당연히 그와 비례하여 실력이 향상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클래식 작곡가들은 대부분 피아노를 잘 치는 편이고 ‘작곡가=피아니스트’라는 공식이 거의 당연한 일처럼 된 것이죠.

하지만 바로크 시대는 조금 달랐습니다. 피아노가 대중화되기 전이었거든요. 일반적으로 하프시코드를, 교회에서는 오르간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7C 최고의 하프시코드 연주자,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실 거예요.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는 기악 중심의 음악(악기 연주에 초점을 맞춰 만든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음악 연주도 유흥이나 취미생활이 아니라 미사를 돕는 도구로 활용화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연주자 개인의 역량에 주목하기보다는 목적에 부합하는지에 더욱 중심을 두곤 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비발디는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매우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점이에요. 비발디가 꽤 괜찮은 연주자로 성장한 데는 아버지의 공이 큽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이발사이자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거든요.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비발디는 건반악기보다 현악기를 더 잘 다뤘고, 특히 바이올린에 소질을 보였습니다. 후에 부자가 함께 연주 여행을 떠날 정도로 아버지는 비발디의 음악 인생에 큰 디딤돌이 되어줍니다.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는 것도 이미 특이한데, 비발디는 독특한 직업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비발디의 공적인 직업은 작곡가가 아니라 신부님이었어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터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그럴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신앙에 의지해 이겨내려고 했던 경험이 그를 사제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음악가로만 확동하기에는 흉부 관련 질병으로 체력이 약했기 때문에 사제가 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사제가 된 후에도 꾸준히 연주 활동을 했고 몇백 곡의 작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체력 문제보다 신앙심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15살에 사제 공부를 시작한 비발디는 십 년 뒤인 25살에 성직자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신부가 된 지 일 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미사를 접전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아요. 비발디는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악장으로 활동하는 신부님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꿉니다.

신부님 비발디가 작곡한 작품 하나를 들어보도록 하죠.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셨던 분이라면 익숙한 음악일 겁니다.

추천곡 1 : 『조화의 영감』 Op.3.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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