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슴속에 아련하게 자리한 노래, 샹송

 

영어의 'song'에 해당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샹송(chanson)은 '특정한 분위기와 스타일'을 지니는 프랑스의 대중음악을 일컫는 일반명사다. 그 분위기에는 민속음악과는 구분되는 중세의 음유시인(troubadour)의 전통에서부터 20세기 초의 뮤직홀과 카바레 음악의 독특한 향기가 포함된다. 이는 샹송이 하나의 포괄적인 장르로서 자리한다는 의미이며, 1980년대 후반 이후 프랑스 음악의 커다란 조류로 자리한 랩이나 강한 비트의 댄스와 록 사운드는 그 고유한 의미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샹송이라는 음악 형태에 담긴 프랑스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적어도 이 단어가 내포하는 포근함, 따스함, 빛바랜 사진 속의 옛 추억에 실려 오는 아련함과 같은 뉘앙스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면, 그 이미지의 연상작용에 의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은 다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이브 몽탕(Yves Montand), 아다모(Salvatore Adamo), 자크 브렐(Jacques Brel),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그리고 앙리코 마샤스(Enrico Macias) 등등.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팝송'에서 떠올리는 가수들의 이름과 음악에서 느끼는 것과는 분명 다른 감성이 담겨 있다. 이미 1950년대와 60년대의 활발한 실험을 거쳐 70년대에 완전히 확립된 대중음악의 틀은 동시대의 프랑스 음악에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세계 시장에서 온갖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생성과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샹송은 지속적인 패턴과 스타일을 유지해왔다. 70년대 이후 신세대 젊은이들의 영미(英美)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비롯된, 흘러간 옛 노래들에 식상한 이들에게 환호를 받았던 '뉴 뮤직(New Music)'의 열풍이 일기 전까지 프랑스의 대중음악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고유의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 출신 가수들의 음악에서는, 언어 자체에 담긴 독특한 향기와 여전히 그 맥을 잇고 있는 이국적인 느낌 등을 제외하면 여느 팝 음악과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의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며 우리의 신세대들이 그러하듯 '가요무대'에나 나올 법한 노래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듯 샹송의 본고장에서도 이런 마당에, 다양성이란 것이 발붙일 여지가 없는 얄팍한 문화적 환경을 가지는 우리나라야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어느 새 샹송은 아저씨 아줌마들의 가슴 한 구석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자고 있는 옛 꿈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가끔씩 어렴풋이 떠오르는 선율을 흥얼거리며 아련한 추억을 곱씹는 데에만 그 효용을 가지는 음악이 된 것이다. 무심코 흥얼거리게 되거나 어느 순간 문득 머릿속을 맴도는 멜로디, 오랫동안 우리 주위를 떠나 있던 수많은 선율들, 그리운 목소리들에는 이 앨범의 주인공 앙리코 마샤스 역시 포함되어 있다.

 

2.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 앙리코 마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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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눈망울과 눈썹, 두터운 입술과 선이 굵은 턱, 그리고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을 동반한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로 특징 되는 앙리코 마샤스는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활동을 해온, 프랑스를 대표하는 샹송 가수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샹송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수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그의 음악에는 샹송의 전형적인 특징, 즉 우수 어린 낭만과 노랫말에 있어서의 시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표출해내는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듣는 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 호소하는 듯한 굵은 목소리와, 여느 샹송들과는 차별을 이루는 동양적인 향취 가득한 탁월한 선율이다. 그가 불렀던 숱한 노래들은 스타일에 관계없이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지극히 수려한 멜로디 라인을 내세운다.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유주용의 번안 가요로 유명한 '사랑하는 마음(L'Amour C'est Pour Rien; 사랑은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냐)'이나 역시 유주용이 번안해 불렀던 '추억의 소렌자라(Solenzara)' 등의 친숙한 노래들에 담긴 편안한 멜로디를 떠올려 보자. 또는 한때 음악 카페에서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던 장엄한 분위기의 '녹슨 총(Le Fusil Rouillé)'과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La France De Mon Enfance)' 등 앙리코 마샤스를 대표할 수 있는 노래들을 수놓는, 슬픔이 어린 듯 화려하지 않고 잔잔한, 그러나 더할 수 없이 감성적인 선율과 가볍지 않은 부드러움으로 둘러싸인 특유의 목소리는 어떠한가.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 그의 많은 곡들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 등지에서 커다란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앨범들은 세계적으로 5,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앙리코 마샤스의 음악이 그저 감성을 자극하는 낭만성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그 자신의 아픈 부분을 드러냈고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음률에 실리는 강한 메시지에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랐다. 소위 '피에누아르(pied-noir; '검은 발'이라는 의미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사람을 일컫는 말)'인 그는 조국인 알제리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실감했던 인물이다.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의 독립을 위한 내전 중에 그는 어머니와 누이, 장인과 친구들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결국 그는 정치적인 반목과 이념의 차이를 모두 초월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문제를 소리 높여 외치게 된다. 사랑과 평화, 그리고 '세계는 하나'라는 연대감은 그의 노래에 일관되게 흐르는 가장 중요한 주제다. 그러한 노력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 UN은 그에게 '평화의 가수'라는 호칭을 수여했고, 이후 세계 곳곳의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평화 사절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앙리코 마샤스에게 있어 음악은 모든 사람들을 감정이라는 끈끈한 고리로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다. '모든 이들을 위한 음악'이라는 앙리코 마샤스의 음악관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상의 어느 누구든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다. 리듬은 삶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내 음악 역시 다른 이들의 것과 같다. 나는 내가 쓰고 노래한 음악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의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수많은 이들은 공감했다. 사실 낯선 외국어에 불과한 노랫말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 선율은 여전히 퇴색하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며 은은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목소리에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맡겨 보라. 하나하나의 음들이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겨지고, 우리는 어느 새 음악에 빠지게 되어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 저려 하고 또 몸을 들썩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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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코 마샤스의 본명은 가스통 그레나시아(Gaston Ghrenassia)다.

 

그는 1938년 12월 11일,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알제리의 콩스탕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태생이며 모두 유태교도들이었다.

 

콩스탕틴에서 아랍과 안달루시아 음악을 연주하던 셰크 레몽 레리스(Cheick Raymond Leyris)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 탓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특히 기타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열다섯 살 때에는 (이후 그의 장인이 되는) 셰크 레몽의 오케스트라에 정식 단원이 되어 활동을 했다. 이후 미래가 불확실했던 음악을 잠시 떠나 초등학교에서 문법과 철자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는 역시 책보다는 기타에 더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 즈음 알제리는 19세기 초부터 이어져온 프랑스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한창이었다. 격렬한 내전 속에서 사랑하는 친지들을 잃은 그는 결국 1961년, 아내 쉬지(Suzy)와 함께 고향을 떠나 프랑스 행 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알제리를 떠나 망명자 신세가 되어야 했던 그는 배 위에서 눈물을 삼키며 이후 자신의 첫 앨범에 수록될 '내 나라여 안녕(Adieu Mon Pays)'이라는 노래를 쓴다. (오랜 후에 발표되는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한 노래다.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프랑스의 영토가 아니었다 / 알제(알제리의 수도) 해변의 한가한 태양, 그 곳이 내가 태어난 프랑스 / 독립의 꿈을 꾸기 바로 전,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는 마치 자유와도 같이 연약하기만 했다 / 내가 태어난 그곳 프랑스')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음악의 길을 선택했다. 1962년, 파리의 '황금이불'이라는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는 레이블 '파테(Pathé)'와 계약을 맺고 첫 앨범을 발표한다. 이듬해에는 첫 투어를 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 걸쳐 유행하던 '예예(yé-yé; 2차 대전 후의 베이비붐 세대,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시기를 누린 젊은 세대가 주도한 60년대 초반의 로큰롤 문화)'의 열풍 속에서 가스통 그레나시아라는 이름을 앙리코 마샤스로 바꾼 그는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프랑스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인종과 종교, 국가와 이념을 초월하여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한 그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냈고 앨범은 꾸준히 팔려나갔으며, 그는 명실공히 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북쪽 사람들(Les Gens Du Nord)', '아니, 난 잊지 않았어(Non, Je N'ai Pas Oublié)', '예루살렘의 크리스마스(Noël À Jérusalem)' 등 주목할 만한 곡들이 이 시기에 발표됐고, 70년대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투어가 이어졌고 1976년에는 아름다운 곡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Malheur À Celui Qui Blesse Un Enfant)’이 수록된 앨범 [Melisa]로 골드 디스크를 수상한다. 1978년에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피라미드 아래에서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콘서트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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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1월, UN 사무총장인 쿠르트 발트하임은 앙리코 마샤스에게 '평화의 가수(Chanteur de la Paix)'라는 호칭을 수여했다.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내 어린 시절의 프랑스'와 '이 모든 이유로 나는 너를 사랑해(Pour Toutes Ces Raisons, Je T'aime)', '문 좀 열어줘(Ouvre Moi La Porte)' 등은 이 시기에 새로운 레이블 '트레마(Trema)'를 통해 발표된 곡들이다.

 

이듬해에 발표된 앨범 [한 양치기의 죽음(Un Berger Vient De Tomber)]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타이틀곡은 암살된 사다트 대통령에게 바치는 작품이었다. 1985년 3월, 앙리코 마샤스는 그 자신 오랫동안 지속해온 평화를 위한 활동의 결과로 프랑스의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86년에 발표된 싱글 '푸른 유니폼들 만세(Vivas Les Bleus)'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주제가로 채택되었다.

 

1997년 7월 18일,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어린이들의 보호와 평화를 홍보'하기 위한 순회대사로 앙리코 마샤스를 임명한다. 2000년 3월에는 종교적인 이유(이슬람교도의 유태교도에 대한)로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고국인 알제리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꾸준한 앨범 발표와 투어 등의 활발한 활동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퇴색되지 않은 음악성으로, 한 세대 전과 다름없이 탁월한 감성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선율과 노래를 바탕으로 한 멋진 음악을 고수한 채 말이다. 최근에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이루는 월드뮤직의 요소를 받아들여, 세계적인 흐름에 동참하며 관심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