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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

 

지금 30,40대인 사람이라면 대부분 경험했겠지만 팝송이 마구 유입되던 1970년대 초반 서울에는 씨씨알(CCR) 노래 열풍이 일었다. 길거리 다방이나 트랜지스터는 온통 이 그룹의 노래들로 뒤덮였다.

 

당시 누군가가 “중랑교를 걷기 전에 CCR의 노래가 길거리에 들리고 있었는데, 다리를 건너갔더니 거기에서도 CCR의 노래가 퍼져나오더라”며 혀를 내두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야유회, 고고장 등지에서 젊은이들은 '로다이', '헤이 투나잇', '모리나' 등 흥겨운 CCR의 레퍼터리들에 율동을 맡겨버렸으며, 그열기는 1970년대 말까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심지어 CCR의 최대 히트 송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같은 곡은 외설적인 우리말로 가사가 바뀌어 (요즘 말로 노래 가사 바꿔부르기, 즉 노가바인 셈이다) 유행되기도 했다. 비단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CCR은 당시 일세를 풍미하고 있던 고고 음악의 대명사였다.


이 때문인지 그들 노래를 즐겨 들었던 우리 팝송 팬들은 CCR의 노래를 고고 음악, 이를테면 별다른 알맹이 없는, 따라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댄스음악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고고장에서나 써 먹을 메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크게 다르다. CCR의 경쾌한 곡들은 상당수 정치 사회적 메시지로 가득차 있다. 영어라는 '장애물'을 갖고 있지 않은 본토 미국인들은 CCR 노래의 이런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고 또한 그들 노래가 빅 히트한 터라 지금도 그들이 의도했던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해 보건대 비는 줄기차게 내렸어. 미스터리의 구름은 대지 위에 혼란을 퍼부었지. 어느 시대나 선한 사람들은 태양을 찾으려 하지. 하지만 난 의문이야. 누가 비를 멎게 할는지. 난 버지니아로 가서 폭풍을 피해줄 은신처를 찾았지. 꾸며낸 이야기에 빠져 탑이 자라는 것을 보았지. 5년의 계획과 새 정책은 황금의 체인으로 둘러싸였지. 하지만 난 의문이야. 누가 비를 멈추게 할는지.' '누가 비를 멈추게 할는지(Who`ll Stop the Rain)'


여기서 '비'라는 어휘는 세상의 혼란과 정책의 사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70년, 그 무렵 미국사회의 혼란은 전쟁이라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월남전이었다. 그러니까 CCR의 골든 레퍼터리는 댄스음악이 아니라 반전(反轉)가요였다. 그래서 영국 '프리 시네마'운동의 기수였던 카렐 라이즈 감독은 베트남에서 캘리포니아로 마약을 밀반입했던 사실에 대한 참전 미군의 쓰라린 고백을 소재로 다룬 월남전 영화(로버트 스톤의 다큐멘터리 '개같은 군인들'을 오리지널로 1978년에 영화화했다)에 이 노래의 제목과 아이템을 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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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의 리더 존 포거티(John Forgerty)는 CCR의 중추이자 전부였다. 작사, 작곡, 편곡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룹의 목소리, 정신, 그리고 손과 발이었으며 그룹의 운영까지 총괄했다. <롤링 스톤>지의 한 기자는 이들의 앨범 <호숫가의 시골(Bayou Country)>이 발표된 후 “음반을 만들면서 포거티는 음악과 관련된 모든 것을 혼자서 했을 뿐 아니라 레코딩을 마치고 나서 스튜디오의 청소까지 맡아 했다”며 그의 독점(?)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캘리포니아주의 엘 세리터 교외에서 성장한 그는 친형 탐 포거티(리듬기타), 중학교 동창인 도우그 클리포트(드럼), 스투 쿡(피아노)과 1959년 '블루 벨베츠'라는 이름의 밴드를 조직해 음악활동을 개시했다. 나중에는 매니저의 뜻에 따라 비틀즈식으로 <골리웍스>로 개명, 활동을 계속했으나 성과는 전무였다.


무명 그룹으로 완전히 밑바닥을 맴돌았지만 그래도 성공에의 집념은 버리지 않고 존 포거티가 1967년 6월 육군에서 제대하자 6개월간 피나는 연습을 거친 뒤 공동으로 2천5백 달러의 자본을 투자, 앨범 제작에 임했다. 이는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배수지진이었다. 때마침 팬터지 레코드사가 설립되어 출반이 성사되었고, 이들은 그룹명도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로 바꾸어 전열을 가다듬었다(CCR은 약칭이다). 크리던스는 신조라는 뜻의 크리드(Creed)와 신용을 뜻하는 크리던스(Credence)를 혼잡한 조어로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며, 클리어워터는 포거티의 설명에 따르면 '햇빛이 항상 빛나는 깊고 진실하며 순수한 결정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리바이벌은 복원, 부활의 의미이므로 이 세 단어를 합치면 '반드시 순수한 결정체를 부활시켜 내겠다는 확신'의 의미가 나온다.


이들이 언급하고 있는 '순수한 결정체'란 음악적으로는 미국 대중음악인 록 뮤직의 뿌리로 얘기되는 흑인 블루스였다. 존 포거티의 우상은 시카고 블루스의 양대 거목인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였고 처크 베리, 보 디들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칼 퍼킨스 등 초기 록큰롤 기수들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컨츄리 색채가 강한 초기 록큰롤인 '로커빌리'에 시카고 블루스를 드라마틱 혼합, 미국 남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그는 이것을 흙내음이 짙은 토속적인 음악이라 하여 스왐프 뮤직(Swamp Music)이라 일컬었다.


그가 우울한 음조의 블루스에 심취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어렸을적 포거티는 부모가 싸움질만 계속하는 극히 왜곡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는 가출해버려 영영 돌아오질 않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난 항상 창피했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 싫었다. 내 방은 지하실이었고 게다가 시멘트 바닥, 시멘트 벽이었다. 음악만 붙잡고 살 수밖에 없었다.”


'포르터빌(Porterville)'이란 노래에도 그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찾아와서는 아버지를 언젠가 일꾼으로 부리겠다고 데려가버렸지. 그러나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갚아야 했던 건 나였어. 동네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와 근친이기 때문에 나는 죄로 둘려싸여 있다고들 했지.'


환경은 그로 하여금 하층민이며 노동자라는 '계급 의식'에 눈뜨게 만들었다. '노동자(The Working Man)'라는 곡세는 그룹이 유명해지기 전 밤무대를 전전하며 고생하던 때가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난 일요일에 태어났어. 목요일쯤에 난 직업을 가졌지. 금요일에는 나를 데려가지마. 왜냐하면 봉급받는 날이니까. 토요일 밤에는 난 죽어버리고 싶어. 일요일이 내 머리에 떠오르기 전에.'


이렇기에 1968년까지만 해도 하룻밤 무대 개런티가 30달러였던 것이 히트곡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그 이듬해 출연료가 무려 1백 배나 폭등하는 '신분 상승'과 포옹했지만, CCR은 사치를 격리한 채 수입을 공동 저축하며 청빈을 유지했다. 포거티는 “난 항상 하층 계급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며 "만약 편히 앉아 그 돈을 생각하게 되면 아마도 뿌리에 대한 노래는 결코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그들의 인기 비상이 얼마난 대단했던가를 보기로 하자. 1969년부터 스타급으로 치고 올라선 이들은 1970년 지구촌의 어느 슈퍼스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인기를 과시했다. 그 해 일 년간 무려 '다운 온 더 코너(Down on the Corner)', '순회하는 밴드(Travelin` Band)' 등 골드 싱글이 4곡이나 됐고, 앨범은 <코스모의 공장(Cosmo`s Factory)>, <푸른 강(Green River)> 등 발표한 6장 전부 골드로 기록되었다(골드는 싱글의 경우 백만 장, 앨범은 50만 장 이상 나갔을 때 인정된다). 4곡의 골드 싱글 및 6장의 골드 음반은 한 아티스트가 일 년간 가장 많이 내놓은 골드 디스크로 이 기록은 팝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발표된 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에 죄다 정상에 한발짝 못미친 2위에 머물고 말아 어찌보면 '불운한'(?) 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부와 명예는 의식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사람을 급속히 타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그룹의 왕자로 등극,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위치로 부상했음에도 CCR이 노동계급 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각별하다.


포거티의 말대로 '낮은 데로 임한' 사람에게 포착된 세상이 어찌 향기로울 수 있으랴. 그들의 노래에는 분노와 비탄이 묻어있고 세상의 어지러움에 용해되길 사절함으로써 잉태된 떠돌이꾼 정서가 숨쉬고 있다.


'난 허리케인이 부는 소리를 듣는다. 종말이 곧 닥치고 있음을 안다. 난 강물이 범람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격노와 파멸의 목소리를 듣는다. 오늘밤 나돌아다니지 말라.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 사악한 달이 뜨고 있어. 네 물건을 모두 모아두도록 하라구. 죽을 준비를 하도록 하라구.' '사악한 달이 뜨네(Bad Moon Rising)'


'창문에 촛불을 밝혀놓는다. 왜냐하면 떠나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니까. 비록 내가 가지만 곧 나는 집에 돌아올 거야. 내가 빛을 볼 수 있는 한은. 가방을 싸고 떠나가보세. 난 잠시 방랑길을 밟아야 하는 몸이니까. 내가 사라져버려도 내 걱정은 말아주게. 내가 빛을 볼 수 있는 한은 말야.' '빛을 볼 수 있는 한(Long as I can see the Light)'


당시 CCR의 출신 지역인 웨스트코스트 지역의 록 그룹들은 -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그레이트풀 데드, 컨츄리 조 앤 더 피시 등이 손꼽힌다 - 노래를 통해 혁명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었다. <타임>지는 1969년 6월 기사에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은 이런 그룹들과 달리 혁명을 논하는데 흥미가 없다. 네 명의 단정한 모발과 심플한 복장을 한 이 밴드는 사회변혁보다는 그들의 뿌리나 사람들 간의 문제에 관한 노래를 선호하고 있다”고 그들은 정치적인 데는 거의 관심이 없는 그룹으로 보도했다. 물론 이들은 혁명을 외치지는 않았으며, 특히 그 해만 해도 CCR의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가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무렵 <타임>지가 얘기하는 '사람들 간의 문제'란 바로 전쟁이 아니었던가. 월남전의 회오리가 깊어져 가자 포거티는 젊은이들, 자신들처럼 '못가진 계급 출신'의 자식들에게 불어닥친 공통 감정, 즉 징병의 공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회, 정치적 비평이 노래에 세차게 밀어닥쳤다.


존 포거티는 목청을 높인다.


'밴드가 장군 만세!를 연주할 때 대포는 당신 쪽을 겨누고 있지. 어떤 친구들은 애국적 시선을 이어받고 전쟁에 내보내지지. 당신이 얼마나 바쳐야 하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오로지 더! 더! 더!야. 난 아냐, 난 아냐, 난 군대의 자식이 아냐, 난 운좋은 녀석이 아냐.' '운좋은 녀석(Fortunate Son)'


'어젯밤 난 불길이 시골길로 퍼져가는 광경을 보았어. 아침에 남겨져서 잿더미가 가라앉는 걸 지켜본 사람은 거의 없었지. 누가 화형식을 하는 건가? 왜 화형식을?' '초상(Effigy)'


이 노래 역시 월남전의 폐해를 기술함으로써 전쟁에 저항하는 반전 가요다. 제비뽑기식으로 징병되어 타국만리로 실려가 총부리를 들이대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통은 CCR만큼 진득하게 반영시킨 록 그룹은 없었다. 존 포거티는 음반 청취자들에게 베트남전을 현장 중계해주기도 했다.


'악몽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현실이었어. 그들은 나더러 느릿느릿 걷지 말라고 했지. 악마가 뒤쫗아 온다는 거야. 정글을 뚫고 달려라. 정글을 뚫고 달려라! 돌아보면 안돼. 덜커덩 소리를 들었어. 내 이름 부르는 소릴 들었지. 2백만 자루의 총이 장전되고 사탄이 울부짖으며 총부리를 들고 겨냥하고 있지.' '정글을 뚫고 달려라(Run through the Jungle)'


아마 <타임>지가 1년 뒤인 1970년에 이 그룹 기사를 취급했다면 논조는 많이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단단한 팀웍을 자랑하던 CCR은 1971년 탐 포거티가 탈퇴하면서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네 살이나 아래인 동생 존의 카리스마적인 통치와 우월성이 배태한 형제간 불화가 주원인이었다. 실력은 인정한다 치더라도 '형님 먼저'의 기본 예절을 발휘 못한 동생에게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정신이 번쩍든 존 포거티는 앨범 <마디 그라(Mardi Gras)>를 만들 때부터 그간의 독재를 청산하고 다른 멤버들도 작곡과 노래에 참여시키는 등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지만,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3인조로 유럽 순회 공연길에 오르고 '스위트 하이치하이커'같은 히트곡을 내지만 그룹은 1972년 10월 해체되고 말았다.


포거티는 해산 후 1인 밴드인 '블루 리지 레인저스'(자신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는데, 그룹이 존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자기이름을 쓰지 않았다)로, 1975년부터는 본인 이름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CCR시절부터 누적되어온 팬터지 레코드사와의 해적판 및 로열티 배분 문제 등으로 불협화음을 빚게 되면서 음악 활동에 회의를 느꼈던지 1976년부터는 일체의 음악 작업을 중단한 채 오레곤주의 농장에서 은둔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85년에 거의 10년이라는 기나긴 침묵을 깨고 음반 <중견수(Center-field)>를 발표, 화려한 재기에 성공했다. 여기서 존 포거티는 싱글 '올드맨이 나타났네(The old Man down the Road)'를 크게 히트시켜 재삼 진가를 확인시켰고, 올드 팬에게는 CCR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앨범을 제작할 때까지도 팬터지 레코드사 사장에 대한 미움이 가시질 않아 수록곡 '잰즈는 춤출 수 없어(Zanz Kant Danz)'를 통해 밴스 사장을 질타해마지 않았다.


'잰즈는 춤출 수 없어. 그러나 그는 네 돈을 훔칠 거야. 그를 주시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는 너를 강탈해 눈멀게 할 거야.'


이 곡의 원제는 '밴스는 춤출 수 없어(Vance can`t Dance)'였으나 명예휏손의 소지가 강해 타이틀을 바꾸어야 했다. 존 포거티는 이듬해 다시 <좀비족의 눈(Eye of Zombie)>이라는 음반을 발표하여 원기와 옛 명성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는 히트곡을 터뜨려 저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쓰라린 과거의 극복에도 성공하는 겹경사를 누린다. 솔로 활동 이후 15년간 팬터지 레코드사에 대한 증오로 단 한 차례도 CCR 노래를 연주하지 않았으나 1987년 메릴랜드주 랜도버에서 거행된 파월장병들을 위한 '웰컴 홈' 공연에서 금기를 깨고 옛 노래를 불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로열티 문제로 인한 레코드사와의 구원(舊怨)을 극복할 때가 되었다”고 밝히면서 청중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월남전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해줄 것을 제언했다.


투명하고 경쾌한 리듬과 현실사회에 대한 곧은 정서의 표출로 월남참전용사들을 포함한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CCR과 그 대변자 존 포거티. 현실 반영에 가슴을 닫고 있는 요즘의 팝 풍토를 보면서 우리는 더욱 그와 그의 그룹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