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펑크(Punk) 록의 득세일 것이다. 과거의 록은 헤비메탈이 장악했다면 지금의 록은 펑크가 주요 문법이다. 펑크가 이 시대를 수놓고있는데는 이 시대 젊음의 특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흔히 말하는 언더그라운드나 인디 음악 그리고 서태지에 의해 확산된 하드코어라는 것도 따지면 펑크가 뼈대를 이룬다. 신세대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펑크는 과연 어떤 음악이며 어떤 배경에서 생겨났는지 살펴본다.

 

메이저리그의 정복자로서 우리 한국의 국위 선양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박찬호 선수를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야구를 잘하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그의 한해 성적이 만약 2승20패였다면 언론과 팬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강속구로 본고장의 막강한 타자들을 헛스윙으로 돌려세우는 탁월한 피칭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경기를 열심히 관전하고 또 응원한다.

 

그런데 박찬호가 야구의 전부일까. 다음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박찬호가 잘하지만 나는 그를 응원하는 것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난 그보다 볼을 잘 던지지 못하지만 친구들과 모여 운동장에서 야구를 할 것이다. 난 야구를 수동적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싶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야구는 이른바 '동네야구'일 테고, 그는 프로선수 박찬호에 비해서는 수준이 낮을지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야구를 즐길 것이 분명하다. 이를 젊음의 음악이라는 록에 한번 대입해보자.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거의 빠짐없이 '기타의 신(神)'이라는 에릭 클랩튼을 선망한다. 그의 안정된 테크닉의 기타 음색은 아무나 구사할 수 없으며 열심히 연마해도 될까말까한 높은 경지의 솜씨에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감하게 '그처럼 기타를 연주하지 못하지만 나는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연주하겠다'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못하지만 나도 직접 한다'는 일종의 배짱이다. 이런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마도 '아마추어 자세'가 될 것이다. 펑크는 바로 그런 록음악이다. 연주가 기능적으로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한다'는 자세로서 덤비면서 생겨난 음악이다.

 

말하자면 수동적으로 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엘리트가 아니라 평민(平民)이 하는 것, 심지어 잘하는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학해서 자기의 아마추어 세계를 가꾸는 것, 그런 상황에서 배양된 록이 바로 펑크인 것이다.

 

그럼 평민성과 독립성이 강조된 펑크는 과연 어떤 상황이 가져온 결과물일까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그럼 펑크 록이 출현한 1970년대 중반 영국으로 가보자. 당시 영국의 록 음악계는 발군의 실력을 갖춘 엘리트들, 예를 들면 에릭 클랩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레드 제플린, 퀸, 로드 스튜어트 등 지금도 숭앙되는 록의 전설들이 주도하고있었다. 이들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뛰어난 가창력과 연주력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세를 풍미했고 영국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 중반에 영국의 경제는 총체적 후퇴의 늪에 빠져버렸다. 견디다 못해 영국 정부는 자존심을 꺾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미국 일본 독일 다음의 세계 4위 경제강국이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들어가고만 것이다. 기업이 고용능력을 상실했고 20%에 달하는 실업률에 의해 젊은이들은 직장을 갖지 못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완전히 희망을 상실했고 가슴에는 독과 분노만이 가득 찼다.

 

여태껏 존경해왔던 엘리트 록 뮤지션들을 보는 그들의 눈은 달라졌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엄청난 부를 소유하면서 젊음의 기질을 잃고 사랑타령만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자세는 썩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못하지만 '우리들의 분노를 스스로' 표현할 수 있다. 잘 하고, 또 배워서 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펑크가 바로 우리의 방식이다."

 

방식은 음악적으로 단순했다. 기본 3코드(Ⅰ도, Ⅳ도, Ⅴ도 화음)로 일관했고 기타의 경우 솔로연주는 배격한 채 내리치는 배킹(backing)을 반복했다. 발라드는 전혀 구사하지 않았고 곡은 대개 3분 이내로 짧았다. 연주를 잘 못하는 아마추어의 음악이었으니 복잡하거나 화려할 리 없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펑크는 두 가지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누구도 할 수 있다(Anyone can do it)'와 '네 스스로 해라(Do it yourself)'였다. 그 캐치프레이즈에는 실업자 청년들이 열망한 ''평등과 독립''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유행어가 된 DIY란 바로 '네 스스로 해라'라는 펑크의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펑크의 시작은 런던의 네 청년으로 이뤄진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라는 해괴한 이름의 밴드였다. 노래하는 자니 로튼과 나중 가입한 베이스 주자 시드 비셔스 두 사람의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그룹은 성난 젊은이들의 파괴음이라는 펑크의 성격을 확립했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의 눈에 비친 이들은 음악인들이기보다는 가는 곳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악동들로서 빨강 노랑 등 총천연색으로 물들인 머리, 찢어진 티셔츠에 관객들에게 보인 난폭한 태도는 어른들의 혐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1976년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Anarchy in the UK)'와 이듬해 영국 왕실을 모독하는 내용의 '신은 여왕을 구한다(God save the queen)'를 잇따라 발표해 전 영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섹스 피스톨스는 뒤 곡에서 서구정신의 축으로 자리하고있는 두 가지 가치, 즉 신(神)과 여왕을 속물화하는 불경을 범했다. '신은 여왕을 구해주지. 그녀는 인간이 아니야. 영국의 꿈에는 미래가 없지. 신은 여왕을 구해주지. 그러니까 신은 남자야!'

 

이들에 대한 일반의 평판은 나빴다. 당시 영국의 음악전문지 <멜로디 메이커>는 '섹스 피스톨스와 음악과의 관계는 2차대전과 평화와의 관계가 같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실업자 청년들의 인식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부패한 기성 정치와 엘리트 위주의 사회와 음악풍토에 도전한 섹스 피스톨스에 환호했고, 그 저항의 소음에 열광했다. 그들은 섹스 피스톨스를 통해 자신들을 오랫동안 짓눌러온 가치체계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검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식혁명이었다.

 

펑크의 의의는 이처럼 보수적인 가치와 제도를 조롱하는 순수한 청춘의식의 발로라는데 있다. 1991년에 등장하여 세상을 뒤흔든 그룹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도 섹스 피스톨스가 남긴 딱 한 장의 음반 <네버 마인드 더 볼록스(Never mind the bollocks)>에 감동 받아 자신의 앨범제목을 <네버마인드(Nevermind)>로 붙였다. 90년대 록 음악계를 뒤흔든 이른바 얼터너티브 록이 이 <네버마인드> 앨범과 함께 융기한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90년대의 록은 그 기본이 펑크였던 셈이다.

 

섹스 피스톨스와 더불어 펑크 시대를 장식한 그룹으로 클래시(Clash) 댐드(Damned) 버즈칵스(Buzzcocks) 스트랭글러스(Stranglers) 제네레이션 엑스(Generation X)가 있다. 이 가운데 클래시는 거친 펑크에 레게, 초기 로큰롤, 제3세계 음악 등을 뒤섞어 레코드회사와 기성세대들의 반감을 많이 줄였으며 그 무렵 영국에 만연된 인종차별과 폭력을 규탄하는 운동도 벌여 지성인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펑크가 불량배의 음악이 아니라 성난 젊은이의 저항음악임을 몸소 실천했다.

 

미국도 펑크가 위세를 떨쳤다. 시기적으로는 영국보다 조금 앞섰으며 텔레비전(Television) 패티 스미스(Pattie Smith) 토킹 헤즈(Talking Heads) 라몬스(Ramones) 블론디(Blonde) 등이 뉴욕시 외곽 보워리 지역의 라이브 카페 CBGB에서 펑크를 연주했다. 이들도 이전 록의 예술적이고 느긋한 엘리트 경향에 반발하여 3코드 음악을 했음은 물론이다.

 

펑크의 정신과 연주방식은 상기한대로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에 영향을 미쳤고 1994년에는 원형 펑크에 대중감각을 강화한 그린 데이(Green Day)와 오프스프링(Offspring)이 출현해 펑크 부활을 주도했다. 펑크의 저항성보다는 펑크가 갖는 재미에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들의 인기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일본에서 만난 오프스프링의 기타리스트 누들스는 "펑크는 세상을 변혁하고 저항하는 것도 있지만 즐거움을 누린다는 의미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펑크는 아마도 분노의 재미(angry fun)를 추구하는 음악일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는 삐삐밴드가 펑크의 맛을 전했고 그 시점 신촌과 홍대 앞 클럽에서는 펑크 밴드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와 펑크가 척박한 이 땅에 하층민 젊음의 소리를 전했다. 그 중 크라잉 너트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의 노력으로 차츰 펑크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불량한 음악에서 분노한 청년들의 저항음악으로' 바뀌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