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편성론(編成論) (2)

 

삼각형을 위하여  

 

대체적으로 우리는 트리오 이상의 연주를 얘기할 때 앙상블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물론 기본적으로 듀오 연주 이상의 편성은 앙상블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러나 굳이 트리오 이상의 무대를 거론하는 이유는 듀오와 트리오가 가진 가장 큰 차이점, 즉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받쳐주는 일이 듀오에서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오 이상의 편성에서 우리는 최소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나 둘을 받쳐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앞서 말한 말 왈드론의 이야기가 좀 더 높은 지지를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받쳐 주는 하나와 그 받침을 받는 다른 하나의 존재, 크게 두 개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시각이 득세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트리오 이상의 편성에서 우리는 조화와 부조화의 묘미를 맛본다. 때로 좋은 호흡을 지닌 앙상블의 연주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조화미는 아무래도 어딘가 틀이 맞지 않는 부조화를 느꼈을 때보다는 안정적인 정서를 부여하기 마련이므로. 그러나 동시에 부조화의 논리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린 경우를 찾아보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다. 본질적으로 부조화는 조화의 상대적인 개념이라기보다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할 때 더욱 색다른 아름다움을 내포할 수 있는 법. 그리고 그 조화와 부조화의 이치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편성이 바로 트리오인 셈이다.  


A라는 한 사람이 B와 조화를 이루면서 C와도 적절한 호흡을 유지할 수 있지만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의외로 많은 경우의 수를 가상할 수 있다. 다분히 역설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A와 B 사이에 일어나는 조화미를 느끼면서 B와 C 사이에 일어나는 부조화미를 동시에 간파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얻어지는 감상의 묘미는 의외의 결과로 우리에게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단순히 한 사람이 곡을 리드하고 다른 두 사람이 리드를 받쳐준다는 식의 상투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좀 더 심오한 관계를 얘기한다. 그리고 이런 효과는 항상 안정을 얘기하지 않는 재즈의 진정한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재즈는 공감과 일관된 정서를 전제로 하지 않는, 개인의 직관이 중요시되는 음악이므로.   

 


편성을 들었다는 것  

 

재즈를 듣다 보면 일반적인 편성의 곡들 못지 않게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형태의 만남을 종종 접하게 된다. 흔히 가장 안정적인 트리오 편성으로 일컬어지는 피아노 트리오(피아노-베이스-드럼)는 대부분 피아니스트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처럼 적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현대 재즈에서는 뛰어난 솔로가 가능하지 못한 피아니스트는 트리오 무대에서도 상식선 이상을 넘는 창조적인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얘기하는 편성의 이야기는 모두가 기존의 편성을 부정하여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꿈꾸기 위한 계단 밟기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험을 위한 실험의 편성을 만날 때가 있다는 점은 분명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모든 예술적인 노력이 당위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국 그러한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형태의 음악은 역사적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까. 어쩌면 바로 그런 모험을 택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많은 연주자들이 기존의 편성을 고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편성의 실험이 성공을 거둔 예는 생각처럼 많지는 않았다. 다음 번에는 보다 확장된 편성, 퀄텟에서 시작하여 빅 밴드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와 함께 이런 실험적인 편성에 대한 관찰을 시도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