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마빈 게이(Marvin Gaye)


모타운이 배출한 특급스타로 부드러우면서도 중량감 있는 노래를 들려준 인물. 60년대에는 여가수와 듀엣 등으로 내내 사랑노래를 불렀으나 70년대 들어 월남전과 흑인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다른 길을 밟았다. 이와 관련, 71년의 앨범 <What's Going On>은 메시지 사운드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후에는 성적(性的) 테마의 노래도 많이 불렀다.


1939년 워싱턴 태생으로 침례교목사인 아버지의 교회에서 노래 부르다가 60년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이듬해 모타운의 탐라 레이블과 인연을 맺었다. 모타운 베리 고디 사장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 84년 아버지와 다투던 중 어이없게도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마지막 히트곡이 82년에 발표한 <Sexual Healing>. 상기한 곡 외에도 68년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과 73년의 <Let's Get It On>은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27. 엘튼 존(Elton John)


70년대 개막과 함께 혜성처럼 출현해 10년간을 완전 독점한 싱어송라이터이지만 히트행진은 80년대와 90년대도 관통했다. 70년부터 95년까지 26년 매해 차트 톱40 히트송을 내놓은 신통력(?)을 발휘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23년을 훌쩍 깬 이 부문 신기록. 그가 오래도록 정상을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마구 샘솟듯 흘러나온 빼어난 멜로디 제조술 때문.
1947년 영국 미드섹스 태생이며 본명은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 애초 '블루솔로지'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69년부터 작사가 버니 토핀과 짝을 이뤄 히트행진의 채비를 갖췄다. 첫 히트넘버 <Your Song>을 비롯해 <Tiny Dancer> <Goodbye Yellow Brick Road> <Bennie &The Jets> 등 하나둘로는 곤란할 정도로 대표곡 리스트가 화려하다.   원래 여배우 마릴린 먼로에게 바친 곡이었으나 97년 사망한 다이애나 황태자비에게 가사를 바꿔 헌정한 <Candle In The Wind 1997>는 싱글 판매 1100만장이란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제는 엘튼 존이 아니라 엘튼 존 경(卿)이다. Sir Elton John!

28.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The Family Stone)


 

 

1944년 달라스 태생인 흑인 실베스터 스튜어트(별명이 슬라이 스톤)가 이끈 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성장하면서 히피의 개혁 사조에 공감, 사이키델릭한 소울에 정치색과 사회성이 강한 곡을 불렀다. '날 검둥이라고 부르지 마, 흰둥이야!'(Don't Call Me Nigger, Whitey)란 제목의 노래가 말해준다.


메시지보다 더 영감을 준 것은 리더 슬라이 스톤이 펼쳐내는 변화무쌍한 폴리리듬이었다. 때문에 펑크(Funk)의 원조로 항상 제임스 브라운과 함께 언급되며, 나중의 디스코에도 길을 열어준 '리듬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재즈의 거성 마일스 데이비스도 펑크에 관심을 가졌던 때 이들의 음반을 열심히 청취했을 정도.


흑인가수의 경우 단일 곡이 팔릴 뿐 앨범판매는 저조한 관행에도 이 그룹의 앨범은 잘 팔렸다. 70년 히트곡 모음집은 판매고 500만장을 상회했다. 하지만 슬라이 스톤은 마약에 찌들어 70년대 중반부터는 급격히 내리막길로 빠졌다. 천재는 기인임을 말해주는 사례. 대표곡은 <Dance To The Music> <Everyday People> <Hot Fun In The Summertime>.

29.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


1942년 미국 시카고 태생으로 흑인음악의 독보적 영역을 개척한 인물. 기타리스트이자 탁월한 작가로, 60년대에 시카고에서 맹활약한 소울 그룹 임프레션스(Impressions)의 음악적 중추였다. 그룹 시절 <I'm Proud> <People Get Ready> 등 흑인의 자긍심과 해방의식을 일깨우는 메시지 송을 연이어 발표, 흑인 시민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쓴 곡은 대부분 영혼을 불러일으키는 가스펠 풍이었다.


70년에는 솔로활동에 나섰고, 72년에 내놓은 영화 <Superfly>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그의 가성과 타악기 리듬이 어우러진 '메이필드 소울'의 결정판. 90년 공연 도중 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99년 사망했다. 96년 <New World Order>가 마지막 앨범.


동료와 후배들에 의해 93년과 94년 두 차례나 헌정 앨범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높은 역사적 위상을 점한다. 레게의 거성 밥 말리도 자신의 곡에 일부분을 붙인 바 있는, 임프레션스 시절의 곡 <People Get Ready>가 단연 명작 중의 명작.

30. 존 레논(John Lennon)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를 뽑으라면 비틀스겠지만 단 한명의 인물을 고르라면 존 레논일 수밖에 없다. 그는 70년 솔로로 나서면서 비틀스 시절과 작별한 '1인칭 화법'으로 별도의 음악성곽을 쌓았다. 대중적 인기보다 현실자각과 자아발견에 집중했다. '사랑과 평화'가 필생의 모토.


<Mother> <Working Class Hero> <God>이 수록된 첫 솔로앨범 <Plastic Ono Band>이 그 증거품. 이밖에 솔로 앨범 전반에 걸쳐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이 퍼져 있다. 대표곡이 된 71년의 <Imagine>만 해도 평화의 찬가로 인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반(反)자본주의 사고를 노출시킨 작품. 가사는 물론 곡조도 '깐깐한' 게 솔로작품들의 특징이다.
미국 뉴욕의 한복판에서 워터게이트를 성토하는 시위에 나서는 '문화 게릴라'가 되어 닉슨 행정부로부터 비자연장 신청을 거부당하는 수난을 당했다. 사실상의 추방령. 때문에 영주권을 놓고 미 정부와 기나긴 싸움을 벌였다. 5년의 침묵을 깨고 컴백한 직후인 80년 12월8일, 팬이라고 자처한 마이크 채프먼의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

31.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70년대 초반 영국 음악계에 회오리를 일으킨 글램 록(또는 글리터 록)의 상징적 인물. 글램은 사운드 측면에서 하드 록이었지만 극적 시각적 무대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지기 스터더스트'라는 쇼킹한 이미지의 인물을 가공해 스스로 분함으로써 60년대의 사회성과는 판이한 자극과 과잉을 전달했다.


그의 접근법은 우주적, 병적, 양성적이었지만 매우 창의적이었다(실제로 그는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창의성이야말로 오늘날도 그가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제1의 동력. 나이에 무관하게 항상 음악흐름에 민감한 것도 그의 장점. 록에 관한 한 천재로 받들어진다.


1947년 영국 런던 태생. 롤링 스톤스의 히트곡 <Angie>는 80년까지 10년간 살았던 그의 아내 이름이다. 92년 슈퍼모델 이만과 재혼했다. 대표곡은 <Changes> <Space Oddity> <Fame> 등.

32.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


비록 대중적 인기로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Fire)에게 크게 뒤졌지만 '반항 펑크(Funk)'의 진수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두 별개의 대형그룹 팔러먼트/ 펑카델릭(Parliament/ Funkadelic)의 설계 및 운영자. 두 그룹 멤버를 합치면 40명에 달했다.


DVD에도 설명되어있듯 마지막 박자에 악센트를 둔 차별화된 펑키 리듬을 구사했다. 그의 음악은 훗날 90년대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 같은 갱스타 펑크 진영에 역할모델이 됐으며 백인 펑키 록 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는 그를 프로듀서로 모시기도 했다.


전성기 시절 흑인가수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혁신적인 무대를 꾸며, 한때 금색가발을 써 '블론드 흑인'이란 쇼킹한 모습을 선사했고 '마더십'이란 비행선을 띄우는 등의 해괴한 장면을 자주 연출했다. 머리 속에는 늘 반항적 상상력으로 가득 찼다.


“쓰레기로부터 댄스음악을 구하자!”는 게 목표였고(펑크만이 진정한 댄스음악!) 지금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아버지가 싫어하는 모든 음악을 하고자 하는' 지향을 갖고 있다. 194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카나폴리스 태생. <Give Up The Funk> <One Nation Under A Groove>가 대표곡.

33. 밥 말리(Bob Marley)


레게음악의 영웅. 서인도 제도의 조그만 나라 자메이카의 음악을 일약 세계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창출한 인물이다. 70년대에 미국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자메이카 사람이 많이 사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레게의 독특한 리듬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엉거주춤한 비트가 특징인 레게는 90년대 들어 마침내 미국마저 잠식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를 현실의 구세주로 여기는, 이른바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의 신봉자로 전 세계 흑인들에게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를 역설했다. 레게가 선동성이 강한 저항음악(rebel music)임을 일깨워준 인물이 그였다.


1945년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영국장교인 아버지와 나이지리아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와 함께 그룹 웨일러스(Wailers)를 결성해 영미 시장 공략에 나섰고 버니와 피터가 빠진 뒤에도 조금의 후퇴 없이 음반과 공연활동을 지속했다. 81년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뇌종양으로 사망.


앙숙인 자메이카의 보수와 개혁 양당 대표를 초청, 화해시킨 <하나의 사랑>(One Love) 콘서트는 세계적 화제를 모았다. 대표곡은 <I Shot The Sheriff>, <No Woman, No Cry>, <Redemption Song> 등.

34.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영국 캠브리지에서 65년 결성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처음에는 60년대 말의 트렌드였던 사이키델릭 록을 구사했으나, 그룹의 축인 시드 바렛이 치명적 약물중독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진 뒤부터는 견고하고 웅장한 곡 쓰기와 지적이고 진보적인 사운드를 추구했다. 73년에 발표한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70년대 록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1944년 영국 서리 태생인 로저 워터스(베이스)와 캠브리지 출신의 동갑내기 데이비드 길모어(기타)가 그룹의 두 기둥. 닉 메이슨은 드럼, 릭 라이트는 건반을 연주했다. 사운드와 더불어 드물게 현대사회의 소외와 신경증을 다룬 메시지도 당대 음악 팬을 사로잡았다. 특히 대학생을 비롯한 지성인 청취자들이 많았다.

 


79년 늦게 발표한 <The Wall> 앨범으로 엄청난 성공을 맞았지만 데이비드와의 이데올로기 차이로 인해 로저가 뛰쳐나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를 위시한 나머지 멤버들이 핑크 플로이드란 이름으로 공연을 계속 중이다. 대표곡은 <Money> <Brain Damage> 그리고 80년 전미차트 1위에 오른 <Another Brick In The Wall-Part Ⅱ>.

35. 퀸(Queen)


72년 결성된 영국의 4인조 록 밴드. 환상적인 보컬의 간판 프레디 머큐리가 먼저 떠오른다. 1946년 탄자니아 잔지바에서 태어난 그는 퀸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밴드로 견인했지만 91년 에이즈로 세상을 떴다. 브라이언 메이(기타), 로저 테일러(드럼), 존 디콘(베이스) 등 멤버 전원이 작곡 역량을 보유했으며 외모도 출중했다.


75년 영국차트 9주간 정상을 점령한 <Bohemian Rhapsody>가 시그니처 송. 그룹의 클래시컬 기반을 웅변하고 있으며 비디오 클립으로 제작되어 훗날 뮤직비디오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작위적인 보컬' '슈퍼마켓 록'이라는 악의적 비평을 받기도 했으나 그와 무관하게 대중들은 절대적 호응을 보냈다.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룬 공연으로도 초특급. 레드 제플린이 부럽지 않았다. 대중적 취향을 꿰뚫은 예리한 멜로디 감각과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가 트레이드마크. 한국에서도 최고인기를 누렸다. <Somebody To Love> <We Are The Champions>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도 잊을 수 없는 곡.

36. 비지스(Bee Gees)


흑인들의 음악인 디스코를 백인이 장사해 돈벌었다는 비판의 중심에 선 불행한 그룹이지만 70년대 후반 대중음악의 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당시 록 진영은 디스코 앨범을 분서갱유할 만큼 그 노골적 상업성을 혐오했다.


영국 맨체스터 출신인 배리 깁(1947년생) 두 살 아래의 쌍둥이 로빈 깁과 모리스 깁, 3형제가 만든 77년 영화 사운드트랙 <토요일 밤의 열기>는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며 미국에서만 1500만장이 팔렸다. 그들의 디스코는 배리 깁의 가성, 형제들의 낙차 큰 하모니와 코러스, 펑키한 록 리듬이 어우러져 강력했던 게 특징. 멤버들도 마냥 디스코그룹으로 낙인찍힌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디스코로 전향하기 전에는 아름다운 선율의 발라드 전문이었다. 올드 팬들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에 이른 이 시기의 <Holiday> <Words> <Massachusetts> 등을 더 좋아한다. 모리스 깁은 2003년 1월 막힌 대장 치료 중 심장박동정지로 사망했다. 디스코 시절 대표곡은 <Stayin' Alive>와 <Tragedy>.

37. 도나 서머(Donna Summer)
디스코의 여왕(Queen Of Disco). 1948년 12월31일 보스턴 태생. 본명은 아드리안 도나 게인스이며, 독일에 거주하던 75년에 레코딩한 <Love To Love You Baby>가 에로틱한 신음소리와 함께 성적 분위기의 극치를 전하면서 빅 히트한 이후 전성기를 맞았다.

듣기만 해도 침이 마르는 '섹시 디스코'가 주특기. 초기 디스코의 배후인물은 이탈리아 태생이나 독일에서 활동한 프로듀서 조지오 모로더(Georgio Moroder). 그가 뮌헨 스튜디오에서 신시사이저로 주조해낸 '유로디스코'는 미국을 압도했다. 걸작으로 손꼽히는 <I Feel Love>와 <Heaven Knows>도 그의 작품.


때문에 도나 서머는 유럽과 미국 댄스음악 결합의 통로라는 평을 받았다. 인기 절정은 <Hot Stuff>와 <Bad Girls>를 연속 1위에 올려놓던 79년 여름. 80년에 동료뮤지션인 브루스 수다노와 결혼했다.

38.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


평론가 존 랜도는 74년 한 칼럼에 “난 로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것의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라고 썼다. 그의 말대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베트남 패전 이후 미국을 뒤덮은 상업적 디스코 열풍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파워 로큰롤' 뮤지션이었다. 게다가 그는 또한 보수적 미국에서 신음하는 블루 컬러와 민중을 대변하는 메시지의 노래를 불렀다.


75년 그의 <Born To Run> 앨범이 나왔을 때 팬들은 도시 노동자의 고통과 좌절에 공감했다. 84년 <Born In The USA>는 어느덧 나이가 든 베이비붐세대의 양심과 사회의식을 일깨웠다. 전자는 디스코의 쾌락에, 후자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열기를 거스르는 성질의 것이었다. 80년대 내내 그는 '노동자의 대부'로, '로큰롤의 보스'로 통했다.


1949년 뉴저지 프리홀드 태생. 73년부터 백업 그룹 '이 스트리트 밴드'를 거느린 그는 관객과의 일체감을 형성한 열정적 공연으로도 명성을 쌓았다. 로큰롤의 파워와 절규를 재확인시킨 인물이다. 대표곡으로는 상기한 두 앨범의 타이틀곡 외에 <Hungry Heart>, <Dancing In The Dark> 그리고 94년 <Streets Of Philadelphia>가 있다.

39.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70년대 중후반 영국의 실업자 청춘들의 거친 분노를 담아낸 난폭한 펑크(Punk) 록의 기린아. “실업자들에게 러브송은 필요가 없다. 그룹 후나 롤링 스톤스는 비위가 거슬린다. 그들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제시할 것이 없다!”고 외쳤다. 신인을 거부하는 스타시스템은 이들이 타파해야 할 적(敵)이었고 영국 정부와 왕실도 공격 대상이었다.


음악은 코드 셋에, 시종일관 벌 떼가 윙윙거리는 듯 시끄러운 사운드를 몰아대는 반(反)미학 그 자체.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는 그것을 '소음의 벽'이라고 했다. 하지만 록의 전형이라고 할 청춘의 저항성과 순수한 발열(發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록 역사의 특급대우를 받는다. 스티브 존스 외에 자니 로튼(보컬), 시드 비셔스(베이스), 폴 쿡(드럼)이 전성기 라인업. 1956년 런던 태생인 자니 로튼 등 1955년-57년생이 멤버의 연령 대였다.


그들의 공격한 기존 그룹처럼 자신들도 변질되어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자니 로튼은 78년 해체를 선언. 시드 비셔스는 여자 친구 낸시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기다리던 79년 뉴욕에서 헤로인중독으로 사망. 하지만 그들이 씨앗을 뿌린 펑크 록은 잠복해 있다가 90년대 미국의 너바나를 통해 그 파괴력이 되살아난다. 대표곡은 <Anarchy In The U.K.>와 <God Save The Queen>.

40. 클래시(Clash)


섹스 피스톨스의 한계였던 허무주의의 굴레를 벗고 현실과 밀착한 투쟁을 벌인 4인조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스 열풍에 편승해 조금 늦게 등장했지만, 고감도 음악을 구사해 펑크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영국에 머물렀던 섹스 피스톨스와 달리 미국진출에도 성공했다. '펑크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펑크에 자메이카 레게를 결합하는 등 갖가지 사운드패턴을 실험했다. 79년 겨울에 발표한 <London Calling> 앨범은 그들의 기념비적 성과. 또한 그들은 영국에 만연한 경찰의 폭력이나 인종차별에도 맞서 싸웠다. 그 일례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 운동을 주도했다.


1952년 터키 앙카라에서 출생한 조 스트러머(보컬)와 1956년 런던 태생 믹 존스(기타)를 축으로 폴 시모넌(베이스) 니키 히든(드럼) 등 4인조로 활동. 조 스트러머와 믹 존스 간의 갈등으로 86년 해산. 조 스트러머는 2002년 사망. 초기 원시적인 펑크로는 <White Riot>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White Man In Hammersmith Palais> <London Calling> <Rock The Casbah>가 대표곡.

41.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70년대 초반을 장악한 모타운 그룹인 '잭슨 5'의 막내로, 1958년 미국 인디애나 개리 태생. 노래와 춤의 신동이었고, 나이 스물넷에 발표한 82년 <Thriller> 앨범과 함께 지구촌을 들썩거리는 열풍을 야기했다.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와 함께 만든 이 앨범은 인종과 세대를 초월하는 완벽한 크로스오버 사운드의 결정판. 백인도, 노인도, 저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도 열광했다. 막 개화한 MTV의 총아로서, 듣는 음악이 아닌 보는 음악의 시대를 주도했다. '문워크' 춤은 일품.


팝의 제왕(King Of Pop)이란 칭호가 말해주듯 80년대 최고스타. 뛰어난 감성의 보컬과 리듬감각을 지닌 완벽주의자로, 80년대 이후 앨범 6장밖에 내지 않은 소산(小産)이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95년 어린이 성추행 파문 이후 인기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Billie Jean> <Beat It> <The Way You Make Me Feel> 등 대표곡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42. 알이엠(REM)


마이클 잭슨의 <Thriller>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인기를 과시하던 83년, 인디 음반사에서 나온 한 앨범이 로큰롤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는다. 징글쟁글한 기타사운드를 내세운 그룹 알이엠의 그 <Murmer> 앨범은 댄스 판에서 모처럼 로큰롤의 도래를 알렸다. 그들은 이 앨범으로 나중 90년대에 봇물을 이룬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로 숭앙받게 된다.

미국 남부 조지아 애딘스에서 80년 결성. 거기서 1956년에 태어난 피터 벅(기타), 1960년생 마이클 스타이프(보컬), 1958년생 마이크 밀스(베이스)와 빌 베리(드럼) 등 4인조. 그룹명은 수면 시 꿈꿀 때 급히 안구가 움직이는 상태(Rapid Eye Movement)에서 따왔다. 내내 인디에서 암약하다가 88년 메이저 레코드사 워너에서 <Green>을 발표, 주류스타로 솟아났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생전 '현존하는 그룹 중 가장 존경하는 밴드'로 이들을 지칭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일련의 수작앨범을 내놓았다. 빌 베리가 건강을 이유로 97년 탈퇴해 현재는 3인조. 대표곡은 <The One I Love> <Losing My Religion> <Everybody Hurts> 등.

43. 유튜(U2)


이 시대 최강의 로큰롤 밴드. 87년 앨범 <Joshua Tree>가 지구촌을 정복한 이후 조금의 슬럼프 없이 지금까지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미 밴드가 아닌 아일랜드 출신. 더블린에서 76년 결성되었다. 1960년 더블린 태생인 보노(보컬), 1961년생 디 에지(기타), 1960년생 아담 클레이튼(베이스), 1961년생 래리 뮬렌 주니어(드럼) 등 4인조의 조화도 발군이다.


역사를 그리는 보컬이라는 평을 받는 보노의 보컬과 소음을 절제한 디 에지의 명징한 기타울림으로 오리지널리티와 강력한 사운드를 과시. 펑크에 영감을 받았지만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나른한 엘리베이터음악을 배격한다. 교황 다음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은다는 공연도 특급이다.


하지만 그룹을 결정짓는 요소는 조국 아일랜드의 통일문제 등 현실의 왜곡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정치사회성 접근법. 리더 보노는 현재 제3세계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구미 지도자를 설득하는 일로 분주하다. 음악 뿐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으로도 당대 제일이다. 대표곡은 <Sunday Bloody Sunday> <With Or Without You> <One> <Walk On> 등 다수.

44. 마돈나(Madonna)


80년대 이래 지금까지 여성 팝의 최고봉을 지키는 인물. 댄스음악을 구사하면서도 '록의 전설'로 불리는 것은 기존질서에 거침없이 도전하고 여성의 자기결정력을 밀어붙이는 당당한 자세 때문이다. 흑인 성자에게 키스하고 불타는 십자가에서 춤추는 장면의 <Like A Prayer> 뮤직비디오 등 무수한 트러블로 파문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과 같이 MTV시대를 맞아 섹슈얼한 영상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90년대 록 음악계에 일어난 페미니즘운동의 흐름에도 선구자적 자취를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1958년 미국 미시건 베이 시티에서 출생. 84년에 발표한 곡 <Like A Virgin>으로 10대 소녀들 사이에 그녀를 닮으려는 '워너비' 열풍을 자극하면서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딕 트레이시> <에비타> 등의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는 등 전방위 활동을 펼쳤다. 공연으로도 관객을 몰고 다니고 있다. 85년 배우 숀 펜과 결혼했지만 4년 후 갈라섰고 지금은 미국의 영화감독 가이 미첼과 산다. 대표곡은 상기한 곡 말고도 <Holiday> <Papa Don't Preach> <Vogue> <Take A Vow> 등.

45. 프린스(Prince)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이었던 흑인스타로, 마이클 잭슨이 댄스 R&B를 주름잡았다면 그는 록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잭슨처럼 1958년생이며 미네아폴리스 출신. 84년 영화 사운드트랙인 <Purple Rain>에서 동명의 곡, <When Doves Cry>, <Let's Go Crazy>가 줄줄이 히트하면서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마치 사자처럼 포효하는 스테이지도 화제였으며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루는 만능연주자, 작곡가,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93년 이름을 남녀 심벌을 섞은 기호로 바꿔버렸다(2000년에 이름 회복). 반항 그 자체라고 할 만큼 자의식이 강하다.


펑키 성향의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가히 도사로서, 그 독창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평자에 따라서는 마이클 잭슨보다 음악성을 높게 치기도 한다. 공연의 댄스파트너인 마테와 96년 결혼. <Little Red Corvette> <Kiss> <Sign O' The Times> 등도 그의 대표곡이다.

46. 런디엠씨(Run-DMC)


흑인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머물러있던 랩을 땅 위로 올려놓은 그룹. 86년에 발표한 곡 <Walk This Way>가 빌보드 차트 4위에 랭크되면서 이후 랩 히트송이 잇따랐다. 이 곡의 은 록그룹 에어로스미스의 오리지널을 랩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그룹의 주역인 스티븐 타일러와 조 페리와 함께 만들어 '랩과 록의 제휴'를 실증했다. 그것은 또한 흑백의 결합으로, 실제로 그들은 백인 랩 그룹인 비스티 보이스(Beastie Boys)와 합동 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멤버는 조셉 시먼즈(런), 대릴 맥다니엘스(디엠씨), DJ 제이슨 미젤(잼 매스터 제이) 등 뉴욕 퀸스 출신 트리오. 지금 활동하는 후배 래퍼들은 모두 “런 디엠씨는 우리들의 비틀스였다!”고 말한다. 대표 앨범은 <Walk This Way>가 수록된 앨범 <Raising Hell>이며 곡으로는 <You Talk Too Much> <Down With The King>가 있다.

47. 퍼블릭 에니미(Public Enemy)

 

80년대 후반 성난 랩의 표상. 과격한 논조로 억압된 흑인의 분노를 대변하는 동시에 자부심을 일깨웠다. 1960년 뉴욕 롱아일랜드 태생인 척 디를 위시해 플래버 플래브, 터미네이터 X, 프로페서 그리프 등이 멤버. 프로페서 그리프의 일성. “백인은 모두 살인자다. 명심하라! 대학살은 누가 저질렀는가? 히로시마에는 누가 원폭을 터뜨렸는가?”


88년 두 번째 앨범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펑크(Funk)와 갖가지 소리 샘플이 요란하게 뒤섞인 혁신적인 사운드는 놀라운 것이었다. 동시에 <Louder Than A Bomb>(폭탄보다 더 크게) <Don't Believe The Hype>(그 선전을 믿지 마!), <Rebel Without A Pause>(중단 없는 저항), <Party For Your Right To Fight>(투쟁할 권리를 위한 파티) 등 살벌한 메시지도 뇌리를 흔들었다.


소리도 강경하고 자세도 강경했다. 이름부터 공공의 적. 이들이 랩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60년대 블랙파워 운동을 재연한 그룹으로 평가된다. 나중 90년대 말을 장악한 그룹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등 초강력 하드코어 사운드에도 길을 터주었다.

48. 엔 더블유 에이(N.W.A.)


80년대 말에 동부에 퍼블릭 에니미가 있다면 서부 로스앤젤레스에는 이들이 있었다. 퍼블릭 에니미가 저항 속에서도 격식을 지켰다면 이들의 노래엔 백인사회와 기성제도에 대한 조롱, 욕설, 비속어가 난무했다. 당시 파문을 일으켰던 곡 <Fuck Tha Police>(경찰들 엿 먹어라!) 하나로도 충분하다.


퍼블릭 에니미가 하드코어에 씨를 뿌린 반면 이들은 90년대 랩의 새 물결인 '갱스타 랩'을 안내했다. 상대적으로 더 흑인적이었던 셈. N.W.A.는 '불량한 태도의 검둥이들'(Niggers With Attitude)이란 의미. 1964년 캘리포니아 LA생인 닥터 드레와 1959년생인 아이스 큐브 중심으로 이지 이, MC 렌, DJ 옐라가 뭉친 그룹.


90년대 초반 뿔뿔이 흩어지면서 모두들 성공적인 솔로활동을 펼쳤다. 그중 아이스 큐브와 닥터 드레는 각각 91년 <Death Certificate>와 92년 <The Chronic>이란 기념비작을 냈다. 세기말과 새천년의 슈퍼스타인 백인 래퍼 에미넴(Eminem)을 발굴한 인물이 닥터 드레였다. 대표작은 89년에 발표한 앨범 <Straight Outta Compton>.

49. 너바나(Nirvana)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 출신의 3인조 그런지(Grunge) 록 밴드. 면면은 1967년생 커트 코베인(기타), 1965년생 크리스 노보셀릭(베이스), 1969년생 데이브 그롤(드럼). 91년 발표한 싱글 <Smells Like Teen Spirit>이 밀리언셀러가 되고, 앨범 <Nevermind>가 빌보드차트에서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리면서 얼터너티브 록 시대의 화려한 막을 올렸다.


시애틀 소재의 인디음반사 서브팝에서 활동하다가 메이저 레코드사인 게펜DGC에서 일궈낸 쾌거였다. 사운드는 펑크에다 감각적인 리프 등을 결합한 스타일이었고 가사는 거친 은유로 X세대의 좌절, 허무, 꿈의 상실을 표현했다. 리더 커트 코베인은 94년 배격해왔던 성공을 맞이한데 따른 혼란에 시달린 끝에 권총 자살했다.


그의 아내인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도 그룹 홀(Hole)을 이끌며 부창부수로 그런지 록의 화염을 피워 올렸다. 데이브 그롤은 해산 뒤 그룹 푸 파이터스(Foo Fighters)로 인기를 얻었다. 커트 코베인은 록 전문지 <롤링스톤>에 의해 '90년대의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대표곡은 <Smells Like Teen Spirit> 외에 <About A girl> <Come As You Are> <All Apologies> 등이 있다.


50. 펄 잼(Pearl Jam)

너바나와 함께 시애틀 그런지 록의 양웅. 인디 밴드 '마더 러브 본'과 '템플 오브 더 독' 멤버들이 합친 그룹이다. 일리노이즈 에반스톤에서 1966년에 태어난 에디 베더(보컬) 스톤 고사드(기타) 마이크 맥클리디(기타) 제프 아멘트(베이스) 데이브 크루센(드럼) 등 다섯 멤버.  

 

너바나가 펑크스타일의 사운드인 반면, 이들은 헤비메탈의 분위기가 감도는 사운드를 구사했다. 그들을 슈퍼스타로 비상시켜준 91년 앨범 <Ten>은 <Nevermind>보다도 더 많이 팔렸다. 혼신을 다하는 에디 베더의 열창과 카리스마가 그룹의 트레이드마크. 한때 여배우 셰넌 도허티가 그를 만나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을 정도.  

 

그런지 록의 저항성을 실천, 홍보용 뮤직비디오 제작을 거부했고 대자본에 의해 티켓 요금을 고가로 만든 '티켓마스터'를 고소해 법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그런지 록과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사라져갔지만 이들은 단호함으로 그룹을 지키고 있다. 대표작은 <Jeremy> <Daughter> <I Got Id> <Last Kiss>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