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Violin Concerto
in d minor

Frank Peter Zimmermann, violin
Jukka Pekka Saraste, conductor

녹음 : WDR Sinfonieorchester Koln
GroBer Sendesaal, 2010.09

작품의 개요 및 배경

뒤셀도르프에서 지낸 1853년은 슈만에게 최후의 창작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해 10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Op.133은 그의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작품이다. 오랜만에 피아노를 위한 음악으로 돌아온 슈만은 이내 불멸의 세계를 향한 현실 도피로 치닫게 된다. 그 해 5월 슈만은 젊고 영감에 넘치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을 만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요하임이 연주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찬탄을 아끼지 않은 슈만은 일기장에 그 감격을 적어 놓기도 했다. “요하임은 너무 마력적이고 너무 놀라울 따름이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그와 연주했다.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한편 요하임의 소개로 브람스를 만난 슈만은 다시금 창조적 열기에 휩싸인 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곧바로 그는 요하임을 위해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 Op.131을 작곡했고, 뒤이어 1853년 9월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작곡했다. 한편 10월에는 새로 알게 된 젊은 브람스와 자신의 제자였던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요하임을 위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F-A-E 소나타’를 작곡하여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하임은 환상곡, 소나타는 기꺼이 헌정 받아 자주 연주했지만 협주곡은 그렇지 않았다.

1853년 10월 요하임은 자신이 콘서트마스터로 재직하던 하노버 궁정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이후 평생 동안 이 작품을 연주하지 않았다. 1854년 2월, 슈만은 자살을 시도한 뒤 엔데니히의 요양원으로 실려 갔고, 그때 슈만의 모습을 지켜본 요하임은 슈만이 미쳐 있는 상태에서 이 곡을 작곡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더욱 이 곡을 기피했다고 한다. 요하임의 전기 작가인 안드레아스 모저는 요하임이 보낸 편지에서 “정신적 에너지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서 작곡한 듯한 일종의 극심한 피로감이 느껴진다.”라고 쓴 내용을 밝히며 “몇몇 개성적인 패시지에서는 창조적 예술가의 심오한 감수성을 목격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슈만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음악적 창작열로 극복하고자 했던 시기의 작품인 만큼 실제 완성도는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시기에 작곡된 다른 작품들 또한 사이사이 내비치는 천재성, 독창적인 음악어법 외에는 젊은 시절의 곡만큼 눈여겨볼 만한 특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슈만은 자신이 평생토록 열망했던 문학적 상상력, 자아도취적 경향을 이 음악을 통해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하임의 부정적 평가는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클라라 슈만은 이 협주곡의 연약한 성질에 많이 놀랐다. 이 작품이 남편의 명성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슈만의 작품 전집에서 포함되지 않은 채 19세기 내내 비밀의 작품으로 잊혀 갔다. 그러나 브람스는 ‘슈만의 마지막 음악적 생각’이라는 표현을 달아 슈만이 이 협주곡에서 사용한 주제로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3(1854)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주제는 슈만이 천사들로부터(아마도 멘델스존, 슈베르트의 영혼?) 계시를 받았다고 한 것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의 주제 선율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영감에 찬 듯한 멜로디는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천사들의 계시라고 확정지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멜로디는 1842년 작곡한 ‘현악 4중주 Op.41 No.2’의 2악장 주제, 1849년 작곡한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79 No.19’에 사용되었었다. 또한 1854년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한 뒤 어부들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된 다음 날 완성한 다섯 개의 변주곡(그의 진정한 마지막 작품으로 ‘유령 변주곡’으로 불린다)의 주제로도 사용되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 주제는 오래전부터 슈만의 상상 속에 존재한 멜로디였을 확률이 높다.

천사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한 슈만의 광기와 환상이 빚어낸 이 걸작은 요하임과 클라라 슈만에 의해 철저히 숨겨졌던 사실만큼이나 그 재발견 또한 드라마틱하고 미스터리하다. 요하임은 1907년 세상을 떠나면서 작곡가 사후 100년 동안은 결코 이 작품을 연주하거나 출판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니까 이 곡은 1956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3년 3월, 런던에 거주하던 요하임의 조카딸들에 의해 이 곡은 극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옐리 다라니(Jelly d'Aranyi)에게 슈만의 영혼이 들어와서 동생인 아딜라 파치리(Adila Fachiri)에게 이 작품을 찾아서 발표하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물론 이 두 여인은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아무런 정보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곧이어 요하임으로부터 두 번째 영혼의 메시지를 받은 그들은 프러시아 국립도서관에 이 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심령술적인 동기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슈만을 감동시켰던 천사들이 이 작품을 그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별 다른 이야기가 들리지 않다가 4년 뒤인 1937년, 마인츠에 있는 쇼트 출판사는 이 작품의 카피를 당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던 젊은 예후디 메뉴인에게 보여주었다. 메뉴인은 지휘자 블라디미르 골슈만과 함께 그 해 10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작품을 초연하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갑자기 옐리 다라니가 등장하여 초연에 대한 권리는 영적 계시를 받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메뉴인의 연주회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독일은 나치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로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선전하기 위해 유태인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대체할 작품으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독일에서 초연되기를 열망했다. 이 곡은 요하임 아들의 동의를 얻어 게오르크 슈네만과 파울 힌데미트가 편곡,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수정이 가미되어 출판되었고, 결국엔 1937년 11월 26일 나치 독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존경받던 게오르크 쿨렌캄프의 연주와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한 달 뒤 12월 20일에는 텔덱 레이블의 전신인 텔레풍켄 레이블에서 녹음되었다.

한편 미국 초연은 1937년 12월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메뉴인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1938년에는 존 바비롤리와 뉴욕 필하모닉의 협연으로 녹음되었고, 영국 초연은 당연히 다라니가 맡았다. 이후 1988년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토마스 체헤트마이어는 이 작품의 1937년 출판본에 가미된 편곡과 수정을 말끔히 걷어내고 오리지널 스코어를 토대로 녹음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강건하면서도 너무 빠르지 않게’(In kraftigen, nicht zu schnellem Tempo)
아름다운 주제선율들이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소나타 형식을 이루고 있다. 정신적 혼란을 겪던 슈만에게 소나타 형식은 현실적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두운 D단조 도입부를 거치며 저주받은 듯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슬픔에 잠긴 2주제가 제시되면서 슈만의 남다른 감수성이 극대화된다. 이후 오케스트라의 강박증적인 도발과 솔로 바이올린의 회한어린 체념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비관적인 분위기로 코다를 맺는다.

제2악장: ‘느리게’(Langsam)
천사가 불러주었다는 주제가 사용된 악장이다. 따사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색에 잠긴 영혼이 확신에 찬 어조로 노래를 부른다.

제3악장: ‘활기 있게, 그러나 빠르지 않게’(Lebhaft, doch nicht schnell)
폴로네즈 형식의 품위 있는 악장이다. 바이올린의 랩소디 풍 에피소드들이 오케스트라와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며 비상하는 듯한 화려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글 출처 : 네이버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