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테마음악방


Oscar Peterson(본명 - Oscar Emmanuel Peterson , 1925 ~ 2007)

2007년 12월 25일...예수가 남기고 간 인간들의 축제인 크리스 마스에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퍼슨이 타계했었다. 향년 82세.

그의 흥겨운 재즈 연주로 세상은 반세기 이상 즐거울 수 있었고, 나 또한 지난 몇 년간 재즈로 인해 행복했었는데, 이제, 내 젊은 시절부터 사랑했던 그 옛적 재즈 연주자는 누가 남아 있을까...

시간이 쌓여 세월이 가고 그와 함께 누군가가 떠나고, 그 후 또한 기억도 사라지면...나에게도 재즈가 사라질까...

더 이상은 크리스마스도 그리고 겨울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이 그렇게 이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이 겨울이 깊어가고 그 끝에 다다를 때에도 누가 사라지는 지 세상은 관심이 없을 것이고 또 나는 무슨 고집인 것 마냥 재즈의 흐느낌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역시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랑을 할 것이다.

오스카 피터슨.
커다란 체구에 사람좋은 미소를 연주할 때도 놓고 있지 않던 재즈의 숨결같은 이...

글 출처 : 다음카페 재즈 소리사랑

오스카 피터슨은 몬트리올의 쁘띠 브르고뉴의 거친 거리에서 성장했는데 그가 자랄 당시의 몬트리올은 마약과 폭력, 가난이 온통 가득했다. 이웃들 대부분이 흑인이었던 이 거리에서 그는 20세기 초 번성했던 재즈 문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인종 갈등이 아메리카를 휩쓸고 있을 당시 쁘띠 브르고뉴는 재능 있는 수 많은 아프리칸-아메리칸 예술가들에게는 천국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바로 이곳에서 오스카 피터슨은 다섯살 때부터 트럼펫과 피아노 연주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결핵을 앓고 나서는 피아노에만 집중했다.

피터슨의 초기 피아노 스타일에 영향을 미친 연주자들은 테디 윌슨, 냇 킹 콜, 제임스 P. 존슨, 그리고 그 전설적인 아트 테이컴 등을 들 수 있는데 피터슨의 후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트 테이텀에 그를 비견하기도 했다.

사실, 그가 아트 테이텀의 음악적 재능을 처음 깨달은 것은 10대 초반, 아버지가 그 자신을 위해 아트 테이텀의 Tiger Rag이라는 곡을 연주해주었을 때인데 피터슨은 그 음악에 너무 겁을 집어먹은 바람에 그 후 근 두 달 동안이나 피아노를 만지지 못했다고 한다. 피터슨은 또한 누나인 데이지 피터슨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녀는 몬트리올의 저명한 피아노 교습가로서 몇 명의 유명한 캐나다 재즈 뮤지션을 배출했고, 피터슨의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는 곧 뛰어난 피아노 연주와 창조적인 멜로디를 표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게 되고, 캐나디안 라디오에 정기 출현하게 된다. 미국에서 데뷔를 한 것은 노만 그란츠의 1949년 뉴욕의 카네기 홀 공연이었는데, 노동조합 규정 때문에 출연료를 받지는 못했다.

‘총감독’ 노만 그란츠의 레이블(특히 Verve records)과 JATP(Jazz At The Philharmonic) 연주단에 참여한 것은 그의 연주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노먼 그란츠가 피터슨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좀 특이한데 그란츠가 택시를 타고 몬트리올 공항으로 향하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는 오스카 피터슨이 어느 나이트 클럽에서 행한 라이브 공연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란츠는 그 연주에 홀딱 반해서는 택시 운전사 보고 그 클럽으로 가자고 했고 그곳에서 피터슨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오래 지속되었고 피터슨의 연주 인생의 상당 시간 동안 매니저로 함께 했다.

JATP에서 피터슨은 당시의 주요 재즈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를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레이 브라운, 콜맨 호킨스, 벤 웹스터, 밀트 잭슨, 허브 엘리스, 바니 케셀, 에드 타이펜, 닐스헤닝 오스테드 페데르센, 루이 암스트롱, 스테판 그라펠리, 엘라 피츠제랄드, 클락 테리, 조 파스, 아니타 오데이, 프레드 아스테어, 카운트 베이시, 디지 길레스피, 스탄 게츠 등이었다.

50년대 초반 피터슨은 레이 브라운, 찰리 스미스와 함께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를 구성하게 된다. 결성 직후 드러머 찰리 스미스는 냇 킹 콜 트리오 출신의 기타리스트 어빙 애슈비로 교체된다. 스윙 재즈 키타리스트였던 애슈비는 곧 바니 카셀로 교체되었다. 바니 케셀은 1년 후 연주 투어에 지쳐서는 허브 엘리스로 대체되었다. 허브 엘리스가 이 트리오를 떠난 것은 1958년었는데 피터슨과 브라운은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기타 연주자는 없다고 믿고는 기타 대신 드럼 연주자를 영입해서 처음엔 잠시 동안 진 가마쥐(Gene Gammage)를, 그 후에는 에드 타이펜이 참여했다. 이러한 트리오 구성에서 피터슨은 두드러진 솔로연주자가 되었다. 후에 그의 트리오에 참여한 연주자로는 루이스 헤이즈, 바비 더햄, 레이 프라이스, 샘 존스, 조지 므라츠 등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피터슨의 베스트 음반들은 주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MPS 레이블에서 녹음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MPS 이후의 몇 년간은 노만 그란츠가 1973년 설립한 파블로 레코드에서 음반을 녹음했고 좀 더 최근에는 Telrac 레코드에서 음반을 녹음했다. 그가 작곡한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캐나다 조곡 Canadiana Suite’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3년 피터슨은 뇌졸중으로 몸의 왼쪽 부분에 마비가 왔고 2년간 연주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련을 극복해서 오늘날 제한적으로나마 여전히 연주를 하고 있다. 1997년 그는 그래미 공로상 및 국제 재즈 명예의 전당상을 받았다. 이는 그가 여전히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주자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003년 피터슨은 Verve 레이블에서 DVD 'A Night in Vienna'를 녹음했는데 이를 보면 나이 때문에 그의 연주실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은 조금밖에 퇴색하지 않았으며, 비록 길어봐야 1년에 한달, 그 와중에 콘서트 사이 며칠은 체력 회복을 위해 쉬어야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국과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고 있다.

그는 울프 와케너스(기타), 데이비드 영(베이스), 앨빈 퀸(드럼) 등과 함께 연주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그룹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피터슨은 병 때문에 2007년 토론토 재즈 페스티벌 공연과 그를 기리기 위한 6월 8일 카네기홀 올스타 공연을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