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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1946 ~ , 본명 김남진)

 

남진은 1946년,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에서 목포일보 발행인(사장)이자 목포시의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3남 4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의 남진은 국회의원이던 아버지 덕분에 목포에서 최고 부잣집으로 불릴만큼 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남진의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 조병옥 선생 등이 전라도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고 김대중 대통령도 종종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남진은 아버지처럼 정치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인기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 경복중학교를 입학해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어릴적부터 영화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남진은 처음에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했다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하여 영화 지망생으로 지냈다.

그러나 영화 배우를 꿈꾸던 남진은 약 2년 간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정규 1집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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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당시 여러 팝 스타일의 노래들을 불렀지만 히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 장기순 씨가 즐겨불렀던 남진의 트로트 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하자 일찌감치 트로트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 히트곡메이커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남진의 직업은 가수였지만 1967년, 박상호 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처음 출연하면서 부터 영화 배우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에 장일호 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제대 후, 1971년,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복직 당시 여러 가수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정통 트로트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나훈아와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을 기점으로 팝과 트로트를 접목시킨 스타일 곡 〈마음이 고와야지〉, 〈그대여 변치마오〉, 〈님과 함께〉를 주로 불렀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춤사위를 선보이며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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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1970년 대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서로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의 가수로서 지역 사이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박친감 넘치고 활발한 성격과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을 가진 두 가수의 차이점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대한민국 가요계 판도를 들었다 놨다하면서 1970년 대의 가요계를 이끌었다.

 

당시 가수왕상에는 줄곧 남진이 1등을 하여 가수왕상을 수상하고 나훈아는 2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가수가 거의 없었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도 남진은 또한 뛰어난 외모로 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미남배우여서 주연으로 여러 번 캐스팅 되었다. 한창 바쁠 시기에 유명한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약 60 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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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남진은 가수 윤복희와 결혼을 하면서 엄청난 화제를 끌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가정폭행과 연루되어 결국 3년 7개월만인 1979년 3월 9일, 파혼하게 되었다. 남진과 나훈아는 결혼과 동시에 방송 출연이 줄어들고 조용필이라는 실력파 가수의 등장으로 점차 가요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 쯤,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남진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이 시점으로 부터 남진은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두 번째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내다가 1983년에 귀국하여 〈빈잔〉을 발표하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진의 귀국과 함께 남진은 정통 트로트 〈빈잔〉이 히트하였다.

 

그렇지만 약 3년 간의 공백으로 가요계에는 수많은 가수가 등장하였고 결혼 후 신인시절처럼 그다지 인기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1985년 쯤에는 일본에 진출하여 앨범을 발표했지만 다른 가수처럼 히트치지는 못했다. 가수 복직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유흥업소를 운영하였다.

 

1989년 11월, 목포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남진은 조직 폭력배로 부터 테러을 당해 중상을 입어 몇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이 퍼지자 한동안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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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시련이 겹쳐 휴식에 접어든 남진은 1993년에〈내 영혼의 히로인〉를 히트하면서 다시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의 노래는 젊은 층들이 많이 불렀는데 그 당시 많은 5060세대들의 인기를 많이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팬들에게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대한민국판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릴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남진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7년만에 음반을 발표하여 2000년부터 〈둥지〉 ,2005년, 〈저리가〉, 2008년, 〈나야 나〉를 히트시키며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며 대한민국의 영원한 오빠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2008년에는 제1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약 3년 간 역임하였고 2009년에는 가수 장윤정과 함께〈당신이 좋아〉를 발표하여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2010년에는 데뷔 45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하고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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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이 데뷔할 때는 시대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왜색가요라고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가 발족되어 창조적이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가요와 왜색가요는 방송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남진, 나훈아의 등장으로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불러 일으키면서 트로트 말고도 다양한 장르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음반 판매량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을 한 층 발전하게 되었다.

글 출처 : 위키백과